마태복음
2011.07.10 21:30

(145강) 겉과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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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3:25-28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32528.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설교>

 

◉ 겉과 다른 속 ◉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겉과 속이 같다면 그 사람은 속에 있는 그대로 행동한다는 것인데 누가 과연 속에 있는 그대로 행동 하겠습니까? 사람의 속이 의와 착함으로 가득하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의와 착함으로 가득한 속마음 그대로 행동한다면 주변 사람으로부터 착하다는 칭찬과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이름이 높임 받는 기회가 되기 때문에 누구도 자기 속에 있는 의와 착함을 숨기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자연히 속과 겉이 같은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의 속은 의와 착함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더러운 죄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겉으로 드러낸다면 어떻게 될까요? 두말 할 것 없이 참으로 추악한 인간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의 이름과 명예는 추락할 것이고 주변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믿음이 좋다’는 칭찬을 받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믿음이 없다’는 지적을 받기를 원합니까? 이것은 하나마나한 질문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믿음이 좋다’는 칭찬을 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믿음이 없다고 해도 ‘믿음이 없다’는 지적을 받기 싫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처럼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좋다’는 말을 듣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을 드러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속을 자신이 잘 알기 때문에 자기 속에 있는 것을 꽁꽁 감추면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때문에 누구든 자신의 속을 감출 수밖에 없는 것이고, 대신 겉을 치장하고 꾸며서 자신을 그럴듯한 사람으로 보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것을 외식이라고 하면서 책망을 하십니다.

 

 

책망의 대상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인간성에 대해 다시 살펴보면, 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지도자로 자처하며 백성들을 가르쳤고 판단하였습니다. 또한 랍비와 아비로 불리면서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섬김을 받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건을 가장하여 백성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고, 그것을 위해 경문을 넓게 하고 옷술을 크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그들은 철저한 십일조를 위해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드렸지만 율법의 더 중요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려버렸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행함이 오로지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향해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를 보면 철저한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물론 명목은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지 말고 철저하게 하나님께 바치자는 신앙을 내세웁니다. 그런데 그처럼 신앙을 내세워 십일조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담임목사, 당회장이라는 위치를 내세워 교회 재정을 자기 뜻대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목사가 임의로 수억, 또는 수십억을 사용하여 문제로 드러나고 고소당하는 일들도 많습니다. 이것이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려 버린 채 신앙을 강조하는 현대 기독교의 일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외식 ◉

 

예수님은 이들을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는 말씀으로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는 말씀으로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겉과 속이 달랐습니다. 자신들의 속의 상태에 대해서는 관심 두지 않고 겉의 모습만 그럴 듯하고 존경받을 자로 드러내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래서 비록 겉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러난다고 해도 그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한 회칠한 무덤 같은 상태였습니다.

 

 

겉을 아무리 아름답게 꾸민다고 해도 무덤은 무덤일 뿐입니다. 무덤이 무덤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은 사람의 뼈, 즉 죽은 사람의 흔적을 그 속에 두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무덤이라는 본질에서 절대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것을 알지 못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소경이었습니다.

 

 

그러면 겉만 깨끗한 것이 아니라 속까지 깨끗하게 하면 문제는 해결된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속까지 깨끗하게 만든다면 속과 겉이 다르다는 말은 듣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속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요? 속의 더러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속을 무슨 재주로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속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탐욕과 방탕을 속에서부터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와 믿음과 착함만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속의 더러움을 타인에게 발각되지 않고 싶어 하고, 더 나아가서 믿음이 있고 경건한 사람으로 자신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우리들인데, 속과 겉을 같게 하기 위해서 속에 가득한 탐욕과 방탕을 따라 행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까?

 

 

속과 겉이 같으려면 그 길밖에 없습니다. 겉을 아름답게 꾸밀 수는 있지만 속을 아름답게 만들 수 없는 우리가 속과 겉이 같아지게 하려면 결국 속에 있는 탐욕과 방탕을 따라 행동하고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의도가 전혀 아님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착한 일을 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것까지도 겉과 속이 다른 외식으로 규정하면서 책망하는 근거로 삼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데 말씀대로 살려고 하고 봉사하려고 하는 것은 외식이며 겉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너무 아전인수 격으로 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무엇일까요? 겉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보이려고 꾸미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의 잘못됨이라면 앞서 말한 대로 이 잘못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속에 있는 그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탐욕을 따라 행동하고 방탕함을 따라 살아가는 그것이 곧 외식에서 벗어난 것이고 겉과 속이 일치된 솔직한 삶으로 칭송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26절을 보면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겉의 깨끗함을 두고 책망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 됨을 안과 겉의 깨끗함으로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신자는 깨끗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겉의 깨끗함만이 아니라 안과 겉이 모두 깨끗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겉의 깨끗함을 안이 깨끗할 때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안이 깨끗하면 겉도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말씀에서 분명한 것은 신자는 안과 겉이 깨끗해야 하고, 안의 깨끗함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것이고, 겉의 깨끗함은 안을 깨끗케 할 때 되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안의 깨끗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겉의 깨끗함을 통해서 깨끗한 자로 여김 받고 높임 받고자 했을 뿐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외식하는 자로 규정하신 것입니다.

 

◉ 속이 깨끗해지려면 ◉

 

그러면 우리의 속의 깨끗함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한 속은 우리의 힘으로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속에서 탐욕과 방탕을 추방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의 더러움을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죄 없는 예수님의 깨끗한 피가 우리의 더러움을 덮어 주심으로써 깨끗한 자로 여겨주시는 은혜의 방식으로 깨끗한 자의 자리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끗함을 위해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의 피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자신의 속의 더러움의 상태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으로 출발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속이 얼마나 더러운지 그 상태에 대해 관심이 없이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믿는 것은 가짜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없이는 더러운 자일 수밖에 없고, 더러운 자로 살다가 멸망을 받는 것 밖에 없음을 아는 신자만이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참으로 크다는 것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의 신앙의 모습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처럼 경건한 행동을 통해서 자신을 경건한 자로 만드는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새로운 신앙의 세계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더러움을 고백하면서 예수님의 피로 깨끗함을 입는 세계입니다. 내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오직 예수님의 피로써 깨끗한 자로 여김 받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이 세계에서의 믿음은 뭔가 열심을 나타내고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더러움을 보면서 예수님의 피가 나의 생명임을 알고 주를 바라보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속이 깨끗해진 신자는 더 이상 자기 이름과 자기 의를 위한 삶을 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같은 열심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자각할 뿐입니다. 이것이 겉의 깨끗함입니다. 자기 의를 추구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안의 깨끗함과 일치된 겉의 깨끗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깨끗해져야 할 필요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생명의 세계를 보지 못한 자의 생각일 뿐입니다. 생명의 세계를 보았고, 예수님의 피가 자신을 그 세계에 속하게 했음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자신을 깨끗해져야 할 사람이 아니라 깨끗해진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이것은 교만이 아니라 나를 깨끗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지 않으며 은혜 안에 사는 길입니다.

 

 

이미 깨끗함을 입었기 때문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자신을 깨끗하고 경건하고 신앙이 있는 사람으로 보여주기 위해 힘쓸 이유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깨끗함을 입은 신자는 자신의 경건과 자기 신앙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깨끗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여주고 증거하기를 힘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신자는 의의 경쟁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자가 추구해야 할 깨끗함이며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누군가에게 보여줄 만한 의로움과 깨끗함과 경건함이 없습니다. 그 어떤 행위라고 해도 우리를 깨끗하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신자만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마음에 두게 됩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예수님을 두고 사십니까?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헤아려 살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에 두고 살고, 예수님이 내 마음에 살아계신다면 예수님이 살아계신 그 흔적은 어떻게 드러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두고 살아간다면 자신의 영광과 자기 이름을 위한 삶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자기 영광을 추구하고 자기 이름의 높아짐을 위해 뭔가를 행한다면 그것은 외식입니다. 자기 속의 더러움을 보지 않고 자신의 겉만을 바라보는 것이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보다 자기 의를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불신앙의 모습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자 됨, 우리의 의와 깨끗함은 예수님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기 속의 더러움을 보면서 예수님만을 마음에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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