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7.24 16:22

(147강) 원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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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3:37-39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33739.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38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 극복할 수 없는 자기 사랑 ◉

 

 

자기의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였지만 만일 자신들이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시는 지난주의 말씀에서 우리는 인간의 헛된 자신감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나 같으면 하지 않는다’ ‘나 같으면 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할 때가 많지만 막상 어떤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큰소리쳤던 자신감은 사라지고 자신에게 유리한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사랑이라는 한계를 스스로 넘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순간의 자신감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 역시 이 자신감에서 실패한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을 앞 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호언장담을 합니다. 이 말은 베드로의 진심이었을 것이고 또 그럴 자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자신에게 위기가 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예수님의 말씀이나 자신이 했던 장담들은 다 잊어버리고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자기 사랑은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선택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신앙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순간은 얼마든지 예수님을 선택할 자신감으로 넘친다고 해도 그 자신감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말한 대로 인간은 자기 사랑이라는 한계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 사랑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같으면’라는 말을 섣불리 할 수 없는 자들이며 오히려 ‘나도 저럴 수밖에 없는 존재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바른 자기 인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기 사랑은 자신을 돋보이면서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즐겨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자로 부각되기를 원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이 곧 자신의 가치 향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가치 있는 자로 존재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기에 힘쓰면서 겉을 깨끗이 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도덕과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생활을 통해서 존경 받기를 즐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자기 사랑이라는 욕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의 상태를 회칠한 무덤 같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겉을 깨끗하게 한들 안은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

 

 

우리는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떤 사람과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복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복 있는 자로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하게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를 말씀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복 있는 자 앞에 세워보면 어떨까요? 복 있는 자와는 전혀 반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심령이 부요한 자(물론 하나님에 대해 부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 부요한 것을 말합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며 자랑하는 자, 자기 힘을 믿고 사는 자, 세상에서 성공하고 가치 있는 자 되는 것에 주리고 목마른 자, 용납하기보다는 판단과 비판을 일삼는 자, 그럼에도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는 자, 이웃을 경쟁과 시기의 대상으로 삼는 자, 자신에게 불리한 길은 피해 버리는 자,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실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한 복 있는 자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에 가깝습니까? 자신이 어떻다는 것은 여러분 스스로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되지 말고 복 있는 자가 되자’라고 한다면 그 또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지 못한 무지한 자의 헛된 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한 복 있는 자는 윤리와 도덕으로 탄생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애쓴다고 해서 되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의 아주 정직한 실상인데 그 또한 우리 스스로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정답은 예수님을 원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한 복 있는 자는 예수님이 우리의 심령에 살아계심으로써 되어 집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계시는 심령의 상태가 바로 가난한 것이고, 애통함이 있는 것이고, 의 주리고 목마르게 되며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항상 예수님을 원하며 살아간다’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헛된 자신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분의 삶에서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서 진심으로 필요한 것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육신이 원하는 것은 돈일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보다 육신이 더 강하기 때문에 마음은 육신에 져서 육신에 이끌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원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37절에 보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자녀를 모으려 하셨지만 그들이 원하지 않고 거절한 것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선지자들을 죽이고 그들에게 파송된 자를 돌로 쳤던 조상들의 죄의 속성을 그들도 예수님을 거절하고 배척함으로써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또한 예수님을 원하지 않고 거절하는 자일뿐입니다. 자기 사랑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내게 유리하고 세상에서 좀 더 잘되는 길을 추구할 뿐입니다. 나의 꿈과 소망과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게 다가오신 예수님은 거절하고 대신 내가 원하는 예수를 찾아갑니다. 예수님의 피보다는 돈을 더 원하고, 말씀의 세계를 살기보다는 힘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 세계를 더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세계에 대해서도 흥미를 잃어버렸습니다.

 

 

◉ 예수님을 거절함 ◉

 

 

예수님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탄식하십니다. 이 탄식은 오늘 우리를 향하신 탄식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38절에 보면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원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결국을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보다는 예수님을 거절한 그들의 심령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없는 마음은 황폐하여 버림받은 것 같은 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항상 세상 것 때문에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만족이 없기 때문에 감사 또한 없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타인을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못할 때에는 낙심하게 됩니다. 이것이 황폐한 심령의 상태입니다. 육신이 부하다고 해도 그 마음은 황폐해져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원하지 않고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두가 예수님을 거절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이 원하는 것을 들고 오셨다면 거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을 들고 오시고 권력과 명예를 들고 오셨다면 세상은 쌍수를 들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들고 오신 것은 피로 인한 죄의 용서입니다. 죄 속에 있는 인간의 구출입니다. 세상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거부했습니다. 자기들에게는 전혀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죄 문제는 자신들이 생각하는 종교 생활로 충분히 해결된다고 여겼습니다. 즉 자신의 의와 착함으로 얼마든지 해결 가능하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오직 자기 백성들만을 모으십니다. 자기 백성을 모으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고, 누구든 예수님을 원하지 않고 거절한 자는 하나님이 모으시는 백성이 아닌 것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 탄식이 있을 때 ◉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모으시는 방법은 죄에 대한 선포와 책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을 모으시기 위해서 선지자를 보내시고 그들의 죄를 책망하시고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죽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거절한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언약을 주시고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만들어 낸 우상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예수님을 원하기보다는 세상을 원하며 살아가는 자기 사랑으로 뭉쳐진 인간을 보게 될 뿐입니다. 그 어디에도 자기 인생을 포기한 채 예수님만을 원하며 살아가는 나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을 보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라고 한탄하시는 예수님처럼 자기에 대한 한탄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사랑으로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끝까지 예수님을 원하지 않고 거절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기 사랑으로 산다고 해서 원하는 것을 채우며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항상 부족함을 느끼면서 감사함이 없는 황폐한 심령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죄에 대한 탄식이 있을 때, 그리고 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무력함과 한계를 절실히 깨달을 때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죄를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말할 때 단지 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으로만 여겼지만 죄를 생각하고 깊은 탄식과 한탄 속에서 예수님을 보게 되면 저주에 갇혀서 영원한 심판을 받아 마땅한 나 같은 자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신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아들에게서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람이 아들을 원하게 되고 돈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아들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있는 인생이 더 가치 있고 복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이 말을 옳다고 여길 것입니다. 몰랐던 내용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길로 가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보시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죄의 세력에 붙들려 끌려가는 현실을 보시면서 주의 도우심을 구하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신감을 내려놓는 것이 됩니다.

 

 

주의 도우심이 아니면 한발자국도 믿음을 향해서 걸어갈 수 없는 나약한 자로 주님께 나오시고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알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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