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7.31 12:52

(148강) 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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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4:1-14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40114.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2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설교>

 

◉ 무너질 성전 ◉

 

 

마24장은 전체가 종말에 대한 내용입니다.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1,2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와 가실 때 제자들이 성전 건물을 가리켜 보이려고 예수님께 나아옵니다. 제자들이 성전 건물을 가리킨 것은 당시 아직 완공되지는 않았지만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건축되고 있었던 성전을 예수님께서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23:38)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제자들이 성전을 가리킨 것은 ‘이렇게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정말로 황폐하게 되고 버림받게 되는 것입니까?’라고 묻고 싶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참된 성전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여전히 성전이 그들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비록 예수님을 따르고는 있었지만 그들 역시 백성들과 함께 웅장하고 화려하게 지어져 가는 성전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 여겼을 것입니다.

 

 

성전의 든든함은 곧 이스라엘의 든든함으로 여겼고 반대로 성전의 무너짐은 이스라엘의 무너짐을 의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에 제자들은 성전을 가리키면서 정말로 황폐하게 되고 버림받게 되는가를 묻고 싶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의중을 아신 예수님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2절)고 말씀합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진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주후 70년경에 로마 군대에 의해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성전이 무너진 것은 제자들이 가리킨 그 웅장하고 화려한 성전이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참된 성전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지금의 교회들이 예배당을 성전으로 일컫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무너뜨린 것을 다시 세워 하나님의 집이라 우기는 어리석은 행보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성전이 무너질 것에 대해 말씀하시자 어느 때에 그런 일이 있을 것인가를 묻고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질문을 하게 된 것은 성전의 무너짐은 곧 이스라엘의 멸망을 의미한 것이고 이스라엘의 멸망을 세상의 끝, 즉 종말의 때로 여겼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세상 끝과 현실적 문제 ◉

 

 

24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우리의 관심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을 살아가는 것도 무겁고 힘든 현실에서 언제 있을지 모르는 미래의 일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은 귀찮기도 하고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일수도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세상 끝의 징조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만 그 징조들은 인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던 일들이기 때문에 특이하다고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한 징조의 현상들이 보인다고 해도 세상 끝을 생각하기보다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매일 접하는 사건 사고처럼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고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즉 세상 끝은 아예 무시한 채 자기 인생을 위해 매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의식에 세상 끝의 문제는 지금 당장 급한 문제가 아니란 것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세상 끝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급한 것은 현실 문제라고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 끝을 보기보다는 현실을 보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학생들에게는 세상 끝보다는 공부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부들 역시 세상 끝의 문제보다는 아침 점심 저녁에 무슨 반찬을 할지가 더 신경 쓰이고 고민이 되는 문제입니다. 직장인들은 해야 할 일로 골치가 아프고 다른 사람에게 밀리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머리가 아플 지경입니다.

 

 

반면에 말한 대로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에서 부각되는 세상 끝의 문제는 아무리 살펴봐도 현실의 삶에서 멀어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문에 대개의 사람들은 이런 내용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1992년에 사회적인 문제로까지 부각되었던 ‘다미선교회’같은 사건도 있습니다. 세상 끝과 예수님의 오심에 광신적으로 빠져듦으로써 종말이 이르면 세상의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기에 모두가 헛된 것이라는 이유로 현재의 삶은 팽개쳐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과 자신들의 휴거에만 매달린 채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종교적 집회만을 일삼으며 그 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 끝이라는 문제를 현실의 삶과 대비하면서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지나칠 수가 없으며 또한 현실의 삶을 팽개쳐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신자로써 세상 끝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것을 24장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찾아야 할 것입니다.

 

 

◉ 종말의 의미 ◉

 

 

예수님은 왜 성전의 무너짐을 예고하셨고, 왜 무너져야만 했습니까? 이유는 예수님께서 참된 성전으로 이스라엘에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성전이 중심이 된 종교의 세계는 무너지고 예수님이 중심이 된 새로운 신앙의 세계로 교체되어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심중에 신앙의 근간으로 자리하고 있는 성전은 무너져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한 종말은 이러한 무너짐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무작정 세상에 끝이 있고 종말이 있다는 것을 믿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끝이 있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은 세상에 있다고 하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솔직히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대상은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그 모든 것이 무너지지 않고 항상 내게 있고 내 힘이 되어주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그런 사고방식이 예수님을 거절하며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들고 오신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생명이라는 것은 믿고 의지할만한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힘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영생의 문제를 두고 본다면 예수님이 들고 오신 것이야 말로 진정한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들고 오신 것이 복이 되는 새로운 세계를 살기 위해서는 필히 옛 세계, 즉 보이는 것이 복이 되는 세계는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은 예수님의 세계 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심지어는 신자가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행했던 모든 것들도 예수님의 세계에서는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가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종말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세상 끝을 아는 신자라면 최고의 가치성을 주님께만 두고 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가치를 예수님이 아니라 세상에서 찾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증거되고 있는 것이 세상 끝의 징조인 것입니다.

 

 

◉ 징조가 보여주는 무기력한 세상 ◉

 

 

예수님이 말씀한 세상 끝의 징조는 제자들 당시에도 있었던 사건들입니다. 우리 역시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고 기근과 지진 등 수많은 재난을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건들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은 세상은 영원하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할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울의 강남과 서초구에 내렸던 폭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강남과 서초구는 부자들이 산다는 동네입니다. 사람이 원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동네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단 몇 시간의 빗줄기로 인해서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은 단지 자연재해로 여기지만 신자의 눈에는 세상은 무너질 곳이며 그 어느 곳도 예외가 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징조로 비춰져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예수님께 두면서 예수님이 들고 오신 것만이 참된 복임을 감사함으로 고백하는 것이 이미 세상의 끝에 서 있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처럼 우리에게 굳게 서 있는 기존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대신 참된 복의 세계를 굳게 세우는 작업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종말은 단순히 심판이라는 의미에서 해체와 파괴라는 시각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새로운 세계만이 남는 것이 종말이기 때문에 새로운 세움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종말입니다.

 

 

종말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인생을 살아가다가 죽으면 천국가면 되고, 혹 살아있을 때 종말이 이르면 그때 구원 받으면 된다는 막연한 기대가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종말의 때를 알지 못하고 또 알 수 없기 때문에 성실히 교회를 다니는 것으로 종말을 준비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무너짐에 중점을 두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무너져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기존의 것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 있는 것으로 세워지는 작업을 진정한 종말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이 그들의 생명과 안식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도 생명과 안식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것으로 평안과 행복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것은 모두가 지나가는 것들이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아끼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내 손에서 사라지는 사건들을 통해서 아픔과 고통을 경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기뻐하고 행복감을 누리는 것도 있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내 손에 있는 것들도 모래알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사라질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서의 우리의 끝이 죽음이라는 것이 단적인 증거입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예수님이 말씀한 징조들을 통해서 수시로 확인할 수 있으며 결국 확인되는 것은 영원한 것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정말의 징조를 보며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세상만을 보면 예수님의 존귀함은 다가오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원하기보다는 세상 것을 원하면서 하나님을 부르게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세계보다는 돈으로 사는 기존의 세계를 원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보셔야 할 것은 여러분 앞에 계속 드러나고 있는 세상 끝의 징조입니다. 그 징조들을 통해서 세상의 모든 것이 지나가는 것이고 사라지는 것이고 무너지는 것일 뿐임을 자각하셔야 합니다.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 그 어떤 것도 지나가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힘을 막지를 못합니다.

 

 

가치 있게 여기는 그것들까지도 지나가게 하는 힘에 밀려서 함께 지나가고 사라질 뿐입니다. 여러분은 징조들을 보면서 그 같은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영원한가를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하셔야 합니다.

 

 

13절에 보면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은 원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는 예수님을 가치 있는 분으로 여기며 예수님만 원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리석고 헛되게 보이는 일이기에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구원은 이러한 신자에게 해당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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