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8.14 13:47

(149강) 큰 환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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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4:15-22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41522.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설교>

 

◉ 재난과 징조 ◉

 

 

우리는 지구상에 있었던 대재난에 대한 기억들을 갖고 있습니다. 미얀마와 인도네시아, 중국과 일본 등 최근에 있었던 재난으로부터 몇 년 전의 사건들까지 몇 만 명에서 수십만 명이 죽은 엄청난 재난들입니다. 이러한 재난에는 후유증 또한 엄청납니다. 재난으로 무너지고 엉망이 된 삶의 터전을 복구하기 위해 수많은 돈과 시간과 노력이 소요될 것이고, 재난으로 인해 불구자가 되고 부모를 잃고 자식을 잃은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러한 대재난 앞에서 아마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까?’‘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셨습니까?’‘하나님은 대재난이 있을 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라고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대재난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기를 거북스러워할지도 모릅니다. 간혹 철없는 사람이 ‘다른 나라는 대재난을 겪지만 우리나라는 평온하게 하신 사랑에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말은 스스로를 신앙인이 아님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 한편으로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이지 세상이 돌아가는 것은 자연의 흐름에 맡겨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가 오고 홍수가 나며 가뭄이 들고 지진이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자연적 현상이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 말이 신자에게는 가장 타당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대재난으로 수 만,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을 하신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차라리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 자연현상이라고 하는 것이 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같은 말이 타당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런 일을 하시는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나고 지진이 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간섭으로 인한 것이라고 믿고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믿음이라면 생각해 볼 것은 대재난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과 세상의 종말에 대해 실감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재난들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종말의 현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말씀에도 “세상 끝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마 24:7,8)”고 답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근이나 지진들이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이미 재난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징조로 벌어지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연 이러한 시각으로 재난들을 바라볼까요? 어쩌면 우리 역시 그 같은 재난들을 세상의 끝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징조로 생각하기보다는 자연현상으로 여기면서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지나치고 잊어버린 채 현재의 삶에만 몰두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아가든 성경은 변함없이 세상의 끝에 있을 환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세상의 끝은 도래할 것이고 말씀이 약속하고 있는 영원한 영광의 나라가 시작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연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 것이 참다운 지혜인가를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 지금 소중한 것이 종말에도 소중한 것인가 ◉

 

 

15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다니엘이 9:27절에서 이스라엘의 성전이 이방인에 의해 짓밟히고 더렵혀질 것에 대해 예언한 내용을 인용하신 것인데 장차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성전 또한 무너질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유대인들에게는 거룩한 성인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짓밟히거든 유대에 있는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십니다. 산으로 도망할 때는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고 하시고 밭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집에 있는 것은 아무런 미련도 두지 말고 도망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모두 집안에 간직을 합니다. 하지만 환난의 때가 되면 집안에 있는 귀중한 것도 거추장스러운 짐이 될 뿐입니다. 그런데도 귀중한 것을 포기할 수 없어서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간다면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귀중하고 물질적 가치가 있는 것들도 환난의 때에는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임을 안다면 귀한 보화가 있고 없고에 큰 관심을 두고 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환난을 아는 신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은 아이로 인해서 도망치는 일에 지장이 있을 것이고 따라서 화가 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환난의 때에 도망치는 일이 임신한 여인이나 젖먹이 아이가 있는 여인에게는 고통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이로 인해서 도망치는 일이 수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인에게 아이는 가장 소중하고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평소에는 그처럼 소중하고 사랑하는 존재라고 해도 역시 환난의 때에는 거추장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로 이 말은 실제로 아이가 거추장스러운 존재이니 아이를 낳지 말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평소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해도 환난의 때에도 변함없이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는 것들은 아니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과연 그것들이 환난의 때, 세상의 마지막 때에도 변함없이 소중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여러분 곁에 있을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또한 도망하는 일이 겨울이나 안식일이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도 겨울에 도망을 치는 것은 힘든 일이기 때문이고 안식일에는 2킬로미터 이상을 걷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그들의 율법에 의해서 멀리 도망을 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이러한 기도를 하고 살아갈까요? 말한 대로 그들이 예루살렘에 이를 환난의 때를 감지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는다면 그런 기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필요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도망 쳐야 할 환난 자체를 생각하지 않는데 그런 기도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메시아의 도래로 인한 다윗 시대 때의 이스라엘의 영광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소망이었기 때문에 기도를 한다면 메시아가 빨리 도래하기를 위한 기도로 넘쳤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큰 환난을 예고하시고 환난 때에 도망을 치는 문제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는 것은 능히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 또한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기도는 자신의 복과 영광이 중점입니다. 늘 세상에서 살아가는 문제로 고민하기 때문에 환난의 때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형편이고 당시 유대인들의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21절)는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을까요?

 

 

사실 본문과 같은 말씀은 지진으로 인해서 땅이 갈라지고 집이 무너지며 사람이 죽어 나가는 참혹한 현장에서 외쳐지는 것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재난이 있는 현장에서 종말을 외친다고 해서 사람들이 세상의 마지막을 감지하며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볼까요?

 

 

아닙니다. 그 어떤 참혹한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다고 해도 세상은 말씀을 거부할 것입니다. 그토록 완악한 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 종말은 은혜를 말하고 ◉

 

 

환난은 우리가 대비해서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환난을 대비하라고 외쳐도 사람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보이는 현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설사 대 재난이 있다고 해도 자연현상으로 여기면 그만입니다. 이처럼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의 외면하고 믿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멸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예루살렘의 멸망입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이 직접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씀 듣기를 거부하며 오히려 예수님을 죽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왜 멸망을 당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악의 정점입니다.

 

 

죄의 결과는 심판입니다. 누구도 이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을 보여주는 현장만이 아니라 죄에 갇힌 자를 향한 저주를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멸망을 받는다는 것을 눈에 보이는 재난으로 실감하고 확인하고 믿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실감하고 확인하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사건이 왜 세상이 멸망을 피할 수 없는가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처럼 큰 환난과 세상 끝에 대한 말씀 앞에서 신자는 두려워하거나 근심하고 걱정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큰 환난에 대한 말씀에서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더욱 깊이 확인하게 될 뿐입니다. 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 속에서 신자는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붙들고 있음을 깨달으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날은 큰 환난의 날을 말합니다. 그 날들을 감한다는 것은 큰 환난에서 피할 길을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환난에서 피할 길로 오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이것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이유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택하신 백성을 위해 그 날들을 감하신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자로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은 것이 됩니다. 환난의 때에 구원 얻을 육체가 없는데 여러분은 구원 받을 자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믿고 의지하고 사랑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종말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것은 믿음의 길에서는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것일 뿐임을 알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신자로써 그리스도만 소망하고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방인과 똑같이 어리석은 자로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큰 환난에서 주의 사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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