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9.04 12:58

(152강) 깨어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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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4:32-44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43244.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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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35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36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3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둑이 어느 시각에 올 줄을 알았더라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설교>

 

하나님을 가장 잘 섬겼노라고 자부하는 예루살렘이 멸망한다면 그것은 세상 어디에도 영원히 존재할 나라는 없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멸망으로 이끄셨다면 다른 나라들이 예루살렘보다 더 나아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나라로 존재하지 않는 이상 멸망은 불을 보듯 뻔 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멸망의 징조는 예루살렘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한 징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세상이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실상은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뜻 안에 붙들려 있는 것이고,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35절)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참된 현실로 이미 이 세상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은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나라임을 증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라고 말함으로써 그들 앞에 서 있는 헤롯 왕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헤롯왕이 참된 왕이었다면 또 다른 유대인의 왕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보내심으로써 예수님만이 참된 왕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나라가 임한 것은 기존의 세상 나라를 참된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존재한다면 기존의 세상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반드시 무너질 곳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을 징조들을 통해서 자각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 징조로 보게 되는 것 ◉

 

 

무화과나무의 비유가 이 같은 사실을 말해줍니다.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는 것처럼 징조들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단순히 재림이 임박했다는 의미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의 무너짐과 함께 인자의 나라, 즉 영원한 예수님의 나라가 시작될 것임을 알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이르렀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인자가 곧 오신다는 재림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시간적으로 인자가 곧 오실 때가 되었다는 재림의 의미로 이해한다면 ‘곧 오신다고 한지가 언제인데 아직 안 오시는 것이냐’라는 말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이르렀다고 말씀한 후 벌써 이천년의 시간이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징조는 멸망이 가까이 왔다는 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예루살렘의 멸망이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다는 선포로 다가오는 것이고, 징조를 보면서 기존의 세상이 아닌 하나님이 이루시는 새로운 나라에 소망을 두라는 것이 징조를 말씀하시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지진으로 흔들리고 기근과 전쟁으로 고통을 받습니다. 불법이 성하므로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서로 대적하고 미워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한 징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징조를 지금의 현실에서 생생히 목격하고 살아갑니다. 목격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 자신 또한 징조에 해당된 자로 살아갑니다. 서로 미워하고 대적하는 모습이 우리에게서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세상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유토피아를 꿈꿉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이고 환상일 뿐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유토피아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는 자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진과 전쟁으로 불안해하고 서로 미워하고 대적하며 남을 짓밟아서라도 자신은 성공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으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나 또한 상처를 입습니다. 이러한 세상이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같은 징조들을 보면서 세상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징조를 통해서 세상은 무너질 곳임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면서 예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만이 영원할 참된 가치가 있는 나라임을 깨달으면서 세상을 떠나야 할 곳으로 바라보는 것이 징조를 보면서 때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만약 세상을 무너질 곳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신자의 삶은 세상과 다르지 않게 됩니다. 세상은 오로지 자신의 삶에 몰두한 채 살아갑니다. 세상이 무너질 곳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단지 자기 인생만 잘되면 최고일 뿐입니다. 이것이 노아 때의 세상의 형편이기도 하고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 데려가고 버려두고 ◉

 

 

38,39절에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자기 일상생활에만 매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홍수로 멸망을 받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상생활만을 중요하게 여긴 것이 그때의 삶의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했어야 한다는 것일까요? 어차피 홍수로 다 망할 것이니까 먹고 마시는 것도 하지 말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도 다 헛된 거니까 하지 말라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신자라고 해서 일상생활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일상생활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것은 곤란합니다. 신자는 일상생활을 산다고 해도 세상을 무너질 곳으로 바라보는 열린 눈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일상생활도 언젠가는 끝날 날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 영원하지 않는다면 우리 일상생활까지도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끝나는 일상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일상생활에 매이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40,41절을 보면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데려감과 버려둠으로 구분되는 차이는 삶에 있지 않습니다. 데려감을 받은 사람이나 버려둠을 당한 사람 모두 동일하게 밭에 있었고 맷돌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려감을 받은 사람은 밭일을 하면서도 기도를 했다거나 맷돌질을 하면서 찬송을 불렀기 때문이 아니란 것입니다.

 

 

구분의 기준은 생각이고 앎입니다. 즉 세상은 끝이 있고 모든 것이 무너질 것임을 알고 생각하는 것과 세상의 끝을 전혀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의 차이인 것입니다.

 

 

기근과 전쟁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세상의 무너짐을 보게 됩니다. 세상이 영원할 수 없는 조건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소망을 두어야 할 나라는 영원한 예수님의 나라임을 다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살아가는 자신을 보면서도 예수님의 나라를 생각하게 됩니다.

 

 

영원한 사랑의 나라에 소망을 두게 되고 속히 세상이 끝나고 영원한 나라가 시작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하지만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기근과 전쟁을 보고 사랑이 없는 현실을 보면서도 세상의 끝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상생활은 자기를 위한 생활일 뿐입니다. 그래서 남보다 못한 생활에 대해서는 불평을 합니다. 끝없이 비교하면서 만족과 감사가 없는 삶이 지속될 뿐입니다. 이것이 자기 생활에 매인 자의 현실입니다. 이들이 버려둠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징조를 보면서 세상 끝을 생각하고 예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있는 신자는 일상생활에서도 예수님으로 인해 감사하게 됩니다. 일상생활이 남들이 보기에는 형편없고 초라하다고 해도 당사자는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데려감을 받고 버려둠을 당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 깨어있으라 ◉

 

 

42절에서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말한 것처럼 신자로서 깨어있다는 것은 그 날과 그 때를 생각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기근과 전쟁을 보고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대적하는 것을 보면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세상의 마지막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돈 많고 권력을 가진 자로 세상을 산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로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돈 많고 권력이 있는 자로 큰소리치며 산다고 해도 그것은 금방 끝나게 될 일상생활일 뿐임을 알기 때문에 그러한 삶에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일상생활에 매이게 되면 어디를 봐도 세상이 끝날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 끝에 대한 말을 들어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끝은 우리가알 수 있는 어떤 현상을 동반한 채 임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세상이 망한다는 것을 알고 실감할 만한 엄청난 재앙과 표적을 가지고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6절에 보면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처럼 그 날과 그 때는 아버지만 아실뿐 아무도 모릅니다.

 

 

노아 홍수 때 비가 오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내리는 비를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비가 내리는 것으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좀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여기저기서 물이 넘치기 시작할 때에도 세상의 끝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비는 그냥 자연현상으로 인한 비였을 뿐 하나님의 말씀이 현실로 나타나는 순간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일상생활에만 치중하여 살았을 뿐입니다.

 

 

세상 끝도 다르지 않습니다. 징조는 우리에게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예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을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징조를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현실이 되어 그대로 되어질 것임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임하는 그 순간까지도 세상은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징조들을 보면서 그 날과 그 때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믿습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세상의 마지막의 날도, 예수님의 재림도 지루한 시간이 아닙니다. 신자는 시간을 따지면서 그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날과 그 때가 반드시 있음을 믿는 자로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늦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때가 아닐 뿐입니다. 하지만 재림은 분명히 있을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사실을 확인케 해주십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새롭게 시작된 예수님의 나라만이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것임을 믿을 뿐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언제 오시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다시 오시고 세상 또한 끝날 것이기 때문에 몸은 세상에 있으나 마음은 예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에 모든 소원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말의 반대는 잠자는 것입니다. 잠자는 자란 생각이 없는 자란 뜻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서도 징조를 징조로 알아채지 못하고 세상의 결국에 대한 생각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잠자는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때에 신자가 준비할 것은 징조를 통해서 세상은 무너질 곳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일상생활에서 예수님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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