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10.30 13:07

(157강) 죽으심에 대한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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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1-13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6011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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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 하나님의 뜻에 의한 예수님의 죽음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는 죽으심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실 것에 대한 얘기를 한 두 번들은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거듭 반복되는 죽으심에 대한 이야기가 사실로 다가올 것이라는 위기감이 생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죽으심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반응이 등장을 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에 대한 말씀을 하셨을 때,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은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서 흉계로 예수를 잡아 죽이려는 의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는 유대인의 대표적인 명절인 유월절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몰려 있었기에 예수를 죽이면 혹 민란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을 염려하여 명절에는 하지 말자라고 의논 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계획대로라면 예수님은 유월절이 지나서 사람들이 흩어졌을 때 이들의 손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2절에서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인데 그때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팔리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인간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즉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어린양으로써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예수님이 참된 유월절 어린양이심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연관된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가 용서되고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며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었으며 더 이상 사망에 붙들린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에 속한 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믿음의 내용이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누구나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그러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 향유를 부은 여인 ◉

 

본문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두 사람의 반응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고 또 하나는 은 삼십에 예수님을 넘겨준 가룟 유다의 이야기입니다. 이 두 사람의 반응을 통해서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의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 한 여자가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여인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지만 요한복음 12장에서는 마리아라고 언급되어 있고, 향유 역시 나드 향유로써 제자 가룟 유다의 말에 의하면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일 년 품삯에 해당되는 액수이기 때문에 지금의 가치로는 약 이천만원에 해당하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버리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제자들이 분개하면서 여인을 나무랍니다. 이유는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도 있는데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버림으로써 허비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제자들로 언급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가룟 유다가 그 같은 분개를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 제자들의 분개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고 해도 향유는 땅에 흘러 내려 다시는 못쓰게 됩니다. 비싼 향유를 그렇게 허비하는 것보다는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게 사용한 것이 아니냐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향유를 부은 것을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다고 하시면서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2,13절)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행동을 예수님의 장례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여인, 즉 마리아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고 미리 장례를 예비하기 위해서 그 같은 행동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을 예수님의 죽음을 내다보고 장례를 위한 것으로 여기고 계시기 때문에 여인의 행동과 예수님의 죽음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나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 ◉

 

여러분은 여인의 행동과 제자들의 말대로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우리는 무조건 예수님 편에 서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향유를 붓는 것이 더 가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진심이라면 우리는 신앙을 윤리적 시각에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윤리를 기준 한다면 제자들의 말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예수님의 정신이고 사랑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으로 판단한다면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에 대한 광신일 뿐 바람직한 행동으로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향유를 부어서 허비해 버리는 것보다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사용하면 세상에 예수님의 이름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고, 도움을 받는 사람도 있게 되는 것이니까 분명 더 효율적이고 가치 있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행동에 가치를 부여하여 가치 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이 더욱 가치 있는 인간이 된다는 생각에 의한 판단일 뿐입니다.

 

 

윤리와 도덕이 이 같은 생각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윤리와 도덕은 좀 더 가치 있는 행동을 하여 가치 있는 인간으로 살아가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죄로 인해 사망에 처할 자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치 있는 행동을 한다고 해서 죽음을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죽음을 대신 짊어지고 그 길을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신 것이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살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에게는 생명의 길이 열리는 참으로 존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존귀하고 거룩한 것으로 나타내는 여인의 행동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때문에 예수님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한 여자가 행한 일을 단순히 시신에 향유를 발라 장례하는 유대인의 풍습을 두고 한 말은 아닙니다. 즉 여인의 행동을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미리 알고 시신에 향유를 붓는 장례 절차를 행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기억되어야 할 여자가 행한 일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존귀하고 거룩한 것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왜 가장 존귀하고 거룩한 일일까요?

 

 

앞서 말한 대로 예수님의 죽으심이 죄인된 우리에게는 새롭게 사는 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기억하여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죽음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제자들의 눈에는 여인의 행동이 비싼 향유를 쓸데없이 낭비해 버리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실상은 예수님의 죽으심, 즉 십자가 사건에 자신의 존재 전부를 맡기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 죽음의 문제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

 

제자들은 여인의 귀한 봉사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기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 예수님의 죽으심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인의 귀한 봉사를 낭비로만 여기면서 분개한 것입니다. 이처럼 여인의 봉사를 이해하지 못한 분노의 결과를 유다와 연결하여 말하는 것이 14-16절의 내용입니다.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말하고 대제사장들은 은 삼십을 달아줍니다. 출 21:32절에 보면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의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로 쳐서 죽일지니라”는 규례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대제사장들은 은 삼십을 달아줌으로써 예수님을 종의 값으로 평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그 돈을 받음으로써 그 역시 예수님을 그들처럼 값없는 존재로 취급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유다가 예수를 판 것은 돈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만약 돈이 목적이었다면 대제사장들에게 좀 더 많은 돈을 받으려고 흥정을 했을 것입니다. 유다가 대제사장들을 찾아가서 예수를 넘기고자 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많은 돈을 요구할 수도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종의 값에 지나지 않는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넘기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돈이 목적이라기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로 알았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하면 그 나라는 예수님의 나라가 되고 그렇게 되면 제자인 자신들은 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어 버리시면 그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되어 버리는 것이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세월은 결국 헛된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은 결코 환영할 수 없는 것이고, 그 중에서 유다가 예수님에 대한 분노로 돈을 받고 넘겨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다른 제자들 역시 유다와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유다가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넘기고자 한 것도 유다가 원하는 아무 유익도 주지 않고 십자가에 죽어 버리는 예수는 종처럼 가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배경으로 하는 여인과 다른 반응인 것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자신의 전부를 맡길 정도로 존귀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바라보는 반면에 한 사람은 종의 값과 같은 가치 없는 것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극과 극의 반응으로 나타나는 그 중심에는 ‘자신의 죽음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바라보느냐 아니면 육신의 유익을 근거로 해서 바라보느냐’라는 중대한 문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가룟 유다만 예수님을 종처럼 취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그렇게 취급받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말하지만 그 십자가에서 세상의 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복과는 상관없이 다만 십자가에 죽으시는 고난의 길을 가시고 우리 또한 고난으로 인도하신다는 예수에 대해서는 발끈하는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이제 생각해 봅시다.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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