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11.06 16:59

(158강) 나는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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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6:14-25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6142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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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17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18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19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21 그들이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 그들이 몹시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나는 아니지요

23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이르되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설교>

 

여러분께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인생에 어떤 의미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지난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위해서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버린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삼백 데나리온이 약 이천만원 정도의 액수임을 감안하면 여인의 행동은 미쳤거나 예수님에 대한 광신적인 행동으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여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여 귀한 향유를 허비해 버린 것에 대해 매우 분개했을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여인이 귀한 향유를 무가치하게 허비해 버린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가치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여인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의 가치는 귀한 향유도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증언하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2,13절)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실 예수님의 몸에 귀한 향유를 부었기 때문에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인의 행동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얼마나 존귀한가를 증언하는 믿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아들을 희생시킴으로써 불의한 존재인 우리를 거룩하고 온전한 자리로 옮기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의 확증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자기 인생에 담겨 있는 자신의 꿈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를 거룩과 온전의 자리로 옮기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 앞에 우리의 꿈과 모든 욕심들이 무가치한 것임을 알고 남은 인생 전부가 예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를 원하는 소원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을 따름으로 자신의 꿈과 포부를 이루고자 하는 제자들과는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미래의 자기 인생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지만 여인은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 자기 인생을 깨어 버린 것입니다. 여인은 여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아주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음으로써 그같은 믿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보다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세상에서 영광된 인생을 얻고자 한 제자들의 눈에 여인의 행동은 무가치하고 어리석게 보였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은 삼십에 넘기기로 한 가룟 유다의 행동이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 한 사람의 몸 값인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 버림으로써 귀한 향유를 머리에 부은 여인의 행동을 장례를 위한 것으로 칭찬하고 온 천하에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라고 하는 예수님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기대하십니까? 여러분의 인생이 세상에서 영광된 자리에 도달하도록 도우실 것을 기대하십니까? 이러한 분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은 관심 밖의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은 무가치한 일로만 다가올 것입니다.

 

 

◉ 자기변명을 위한 말 ◉

 

 

가룟 유다의 배신은 유다 한 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 당시 제자들과 오늘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 26:31절에도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는 배신의 길을 가게 될 것임을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비록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굳게 장담을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문제입니다. 자기 인생을 위해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은 결국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버리는 길을 간 것입니다.

 

 

그러면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기기로 한 유다와 자신을 위해 예수님을 버린 제자들이나 베드로의 행동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배신에는 사실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제자들은 이해하면서도 유다는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마치 유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붙들려 죽으신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유다는 당시 예수님을 버리고 배신하는 제자들을 대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를 대표하는 자리에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너희 중의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면서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반응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파는 유다까지도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반문합니다.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은 자신은 스승을 팔아먹은 파렴치한 인간의 대열에는 합류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악인이 아니라 의인의 길에 두고 싶은 것이고,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으로 끝없이 자기를 합리화하고 변명을 일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악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평가 받고 싶어 합니다. 죄인의 대열에는 합류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기에 주저하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위선으로 가득한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러한 위선으로 인해서 겉으로는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내면에서는 ‘나는 아니지요’라는 외침과 함께 자기를 합리화 하고 변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의 실수와 허물을 들춰내면 반발하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인자를 판 사람에게 미칠 화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 할 정도로 크다는 것입니다. 이미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기기로 한 유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많이 불안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주여 내가 바로 예수님을 파는 자입니다.’라는 자기 고백이 아닌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라는 자신의 죄를 감추고 싶어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와 죽으심의 의미를 알지 못한 제자들의 행동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속성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서 이미 드러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고 말씀하시자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는 자기 합리화와 변명으로 자신을 방어하고자 합니다. 이 같은 인간의 속성이 ‘나는 아니지요’라는 제자들의 말에서 그대로 묻어나는 것이고,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 열려 있는 배신의 가능성 ◉

 

 

여러분은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고 팔아버릴 가능성이 없습니까? 우리에게도 배신의 가능성은 열려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가룟 유다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에게 배신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배신의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자신에게서 배신의 가능성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을까요? 만약 자신에게서 배신의 가능성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면 ‘나를 팔리라’는 말씀에 근심할 이유는 없는 것이 아닐까요?

 

 

당시 제자들은 거듭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말씀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에게서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실망감과 함께 예수님을 떠나고 싶은 마음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자신도 예수님을 배신할 가능성이 있음을 생각했기에 근심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로 자신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사람에게서는 회개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나는 아니지요’라는 자기 방어가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는 자기 인정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판 파렴치한 존재임을 인정함으로써 차라리 태어나지 않는 것이 좋을 정도의 큰 화가 바로 자신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만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와 그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나에게 주어질 큰 화가 지나갔기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자랑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17-19절에 보면 유월절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월절은 지나갔다는 뜻으로 출애굽 당시 죽음의 천사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만을 비켜간 것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유월절은 어린양의 피로 인해서 죽음이 지나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게 함으로써 그들의 존재 의미를 유월절에서 찾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도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 되심을 유대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서 사망의 권세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고 지나감으로써 우리가 산 자가 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는 눈을 뜰 수 없는 것이 자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로지 살고자 힘쓸 뿐입니다. 제자들 역시 예수님으로 인해 영광된 자리를 차지하는 인생에만 마음을 두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도움으로 원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는 마음이 향하지 않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 구원의 길을 가는 신자 ◉

 

 

우리가 교회 안에 머물러 있고 신앙생활에 열정을 보인다고 해도 얼마든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버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을 팔아 버린 채 진리와 상관없이 내 길을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니지요’라는 자기변명과 합리화로 나를 방어하는 뻔뻔함까지 갖추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 이런 말씀을 드리는데도 여전히 ‘나는 아니지요’라는 자기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이야기가 여러분의 현실과 무관한 내용으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 이런 이야기들이 세상사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생을 제대로 보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일 뿐입니다.

 

 

인생은 세상을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죽음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이 먹고 사는 데는 처지가 다 다르다고 해도 죽음의 문제에서는 동일한 처지로 만납니다. 우린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니지요’라는 말로 자신을 가려보고자 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의 뻔뻔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뻔뻔함과 배신과 완악함을 파헤치고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이 길을 걸어갈 자가 누구일까요? 그들이 바로 ‘내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라는 자기 고백과 함께 예수님의 죽으심에 자신의 전 인생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우린 항상 ‘나는 아니지요’라는 변명을 일삼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파헤치고 무너뜨리시면서 우리의 죄를 보게 하시고 결국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예수님이 가신 길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을 감사하고 찬송케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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