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2.13 16:44

(125강) 보상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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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9:27-30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9273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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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설교>

 

◉ 영생과 소유의 가치 ◉

 

 

예수님을 찾아온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고 싶어 하기만 했을 뿐 영생의 가치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소유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에 근심하고 돌아간 것입니다. 만약 영생의 가치가 자신의 모든 소유보다 더 크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땠을까요?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소유를 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영생은 모든 소유보다 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셨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의 보화는 그 청년에게는 자신의 소유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보이지 않는 하늘 보화, 영생의 가치를 알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영생을 복이라고 말하지만 과연 영생이란 복의 가치가 나의 모든 소유보다 더 크고 귀하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신자라는 이름으로 하는 말일 뿐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내 소유를 향해 있고 세상을 향해 있을 뿐입니다.

 

 

우린 지금도 부자 되는 복을 마음에 두고 있고 가난은 복을 받지 못한 저주의 현실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예배당에 모여서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말하며 자신이 예수님의 은혜만을 원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착각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린 여전히 내게 있는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린 엉망입니다. 온 몸이 썩어서 악취만 풍기는 존재입니다. 세상에 짓눌린 무거운 몸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린 그러한 자신에 대해 모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나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손에 있는 것을 보면서 많다 적다 따지며 불평을 하고 잃어버릴까 노심초사 하면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우린 모두 천국을 소망하는 신자입니다. 하늘의 생명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가치가 우리에게 얼마나 큽니까? 천국의 가치가 모든 소유를 버리고서라도 얻어야 할 큰 가치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이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오늘 말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보상을 생각한 베드로의 문제 ◉

 

 

구원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베드로가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27절)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하던 일과 가족을 팽개치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일과 가족은 그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일과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은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구원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안되고 다만 하나님으로서만 된다는 말씀 뒤에 이 같은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자신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것을 하나님이 하신 일로 여기고 그 같은 말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것을 자신의 잘한 행동으로 간주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기대하는 인간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27절 다음의 내용과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 비유와 연결하여 다른 방향에서 베드로의 말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사람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단한 일을 했으니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한 보상이 무엇이었까요? 이미 세상의 모든 것을 버렸다고 했으니 세상 것으로 주어지는 보상을 생각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생각한 것은 천국에서의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예수님께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대단한 사람인 자신들에게 천국에서 따로 주어지는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자신을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사람으로 말하면서 또 다시 보상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면 베드로에게 남은 것은 주님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 베드로에게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는 의미를 몰랐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그 가치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따로 얻을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가 무엇을 버렸든 주님을 따르게 되고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신다면 그것으로 베드로는 모든 것을 받은 것이 됩니다. 즉 따로 보상을 기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좋은 것을 받았고 그 좋은 것이 베드로에게 함께 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바라볼 안목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같은 사실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28절)는 말씀을 근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신자에게 주어진 것 ◉

 

 

예수님은 새로운 세상과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는 권세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은 베드로의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입니다. 천국에서 특별히 주어질 것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행한 바에 따라 달리 주어지는 보상이 없는 나라가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자는 이미 그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세상에 참여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이루신 새로운 세상입니다.

 

 

즉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그것은 이 세상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에 참여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할 권세에 참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보다 더 뛰어난 가치 있는 보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다고 하면서 또 다른 보상을 기대하는 베드로의 말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도 그 존귀와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무시한 자의 어리석은 말일 뿐입니다. 청년 역시도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주어지는 복의 존귀함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 소유를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자기 보좌의 영광에 앉을 때에 세상이 새롭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보좌의 영광에 앉은 때는 부활 승천하여 하늘 보좌에 앉으신 때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때를 새로운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시어 자기 백성을 새롭게 하시고 다스리는 시대를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새로운 세상의 가치에 대해 전혀 눈을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말하면서도 여전히 기존의 세상에 집착 한 채 베드로처럼 자신이 한 일을 내세우며 보상이나 기대하는 세상의 기준과 법칙을 그대로 고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새로운 세상으로 불러 들였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에 대해 전혀 무감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안타까움이고 답답함이며 불쌍함입니다.

 

 

새로운 세상의 가치를 알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기존의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고, 그 세상에서 마르고 닳도록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더욱 많은 것을 손에 쥐기 위해서, 그리고 손에 쥔 것을 놓기 싫어하는 그 무거움을 가지고 허덕이며 살아가는 우리의 실체를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불쌍한 자가 누구겠습니까?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베드로처럼 자신을 주님을 따르는 자로 여기면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에 관심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세상에 속한 백성들이 곧 참된 이스라엘에 해당되기 때문에 율법을 중심으로 하고 살아가는 이스라엘은 참된 이스라엘이 아님이 새로운 세상이 백성들로 인해서 증거됩니다. 이것을 두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성령으로 새로운 사람이 되고, 새로운 세상에 속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육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도 할 수 없는 심판이 신자를 통해서 시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함께 한 신자 됨의 가치이며 존귀함입니다. 그런데 또 무엇을 얻고자 하겠습니까?

 

 

◉ 내 이름을 위하여 ◉

 

 

29절을 보면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집, 형제, 자매, 부모, 자식, 전토는 인간에게 있어서 는 기존 세상에서의 삶의 전부입니다. 생존의 의미를 모두 거기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의 이름을 위해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 생존의 의미가 되는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주의 이름의 가치를 알 때 가능합니다. 주의 이름에 담겨 있는 생명이 가치를 알았을 때, 그는 주가 함께 하는 것이 어떤 복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을 여러 배를 받는다는 말로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예수님이 말씀한 그 모든 것을 버려야 영생을 얻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새로운 세상에 대한 안목이 열렸을 때 삶의 의미가 달라짐을 뜻합니다.

 

 

그럼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렸으니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자신을 대견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묻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보다는 결국 자신의 이름을 소중히 여긴 것입니다.

 

 

주의 이름의 존귀함은 생명의 문제로 들어갔을 때 드러납니다. 세상 그 무엇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줄 수가 없고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가능함을 분명히 할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주의 이름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계신다는 그 사실이 놀라운 축복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베드로는 겉으로 본다면 탁월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누가 뭐래도 영생의 1순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을 자기 행위로 간주하며 그에 대한 어떤 보상을 기대하는 그 속성은 천국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30절)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한 것을 토대로 뭔가를 더 얻고자 하는 그 사람이 나중 된 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영생은 사람으로서는 안되고 하나님이 다 하시는 일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하늘로 가시고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주께 두게 합니다. 주님을 알게 되고 주께 마음을 두게 되면 주 예수 그리스도가 곧 우리에게 주어진 보상임을 알게 됩니다. 한 것이 없이 받은 놀라운 보상입니다. 이 보상의 가치를 알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그가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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