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4.17 13:56

(134강) 세리와 창녀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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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28-32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12832.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설교>

◉ 왜 독사의 자식인가 ◉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곳으로 오는 것을 보고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면서 아주 신랄한 책망을 합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사회적 위치와 신분과 그들이 누렸던 권력을 생각한다면 요한의 그 같은 책망은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히 누가 유대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독사의 자식이라는 것은 사탄의 자식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앙하는 유대인들에게는 가장 심한 욕이며 저주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그러한 말을 당시 최고의 신앙가로 자부하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향해 던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을 신앙의 면에서는 완벽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한의 세례가 필요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이 볼 때 세례를 받아야 할 사람들은 세리와 창기와 같은 사람들이었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신들은 회개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소리친 이유입니다.

 

 

요한의 이 같은 말은 유대 신앙의 최고의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전락시키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그리고 서기관 제사장 장로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세례 요한과 일반인의 시각이 달랐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요한과 같은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바리새인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동일한 신앙의 착각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세례 요한이 독사의 자식이라고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고, 곧 멸망에 속한 자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요한과 같은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신앙을 바리새인들과 같은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평가하고 차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기준을 외적인 행위에 두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신앙은 기도와 헌금과 봉사와 말씀에 열심히 있는 것으로 규정되고, 이러한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이 그러한 시각과 기준으로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을 바라봤다면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일반인들처럼 위대한 신앙인으로 영접하지 않았을까요?

 

 

바리새인 제사장 그들은 소위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킨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은, 그들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비록 말씀을 지킨다고는 했지만 정작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기들 방식대로의 실천이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을 지키고 살아온 자신들을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겼지만 요한의 눈에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독사의 자식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지금도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지키는 그가 바로 참된 신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을 누가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말씀을 지킨다는 것을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들과 같은 생각으로 이해한다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목사의 말의 의도는 교회 생활 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 성수, 십일조, 기도 등등에 열심이 있는 것을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결국 교회는 개인의 열심을 토대로 한 신앙의 서열이 발생하게 됩니다. 천국 갈 만한 사람과 가지 못할 사람으로 나누어 판단하게 됩니다. 열심이 있고 선하게 사는 자신은 당연히 천국에 해당된다는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사탄의 속삭임에 마음을 빼앗긴 자의 모습에 해당됨을 알아야 합니다.

 

 

◉ 세리와 창녀 먼저 ◉

 

 

예수님은 이 얘기를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권위의 문제를 들고 나온 제사장과 장로들은 자신들을 권위를 가진 자로 여겼고, 예수님은 성전의 일에 간섭할 권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권위가 지위를 통해 주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높은 지위에 앉아있는 자신들이 권위 있는 사람이고 예수님과 같은 계층의 사람은 권위와는 상관이 없는 부류로 여긴 것입니다.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이 곧 권위이고 보내심을 받은 자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참된 권위의 길을 가는 것임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예수님도 권위에 대한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두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의 실상이 어떠한가를 드러내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맏아들은 가겠다고 대답을 하고서는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가서 똑같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였지만 둘째 아들은 싫다며 거절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를 하신 예수님은 권위의 문제를 들고 나온 사람들에게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고 묻자 그들은 둘째 아들이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이야기에 등장한 둘째 아들은 세리와 창녀들을 뜻하는 것이고, 맏아들은 제사장과 장로들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리와 창녀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한 사람들이며 제사장과 장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말만 있을 뿐 사실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순서를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들어가고 다음에 제사장과 장로들이 들어간다면 어쨌든 천국에 들어가기는 할 것이니까 염려할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누가 먼저 천국에 들어가는가?’라는 순서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유대사회에서 죄인으로 천대 받았던 세리와 창녀들보다 못한 제사장과 장로들의 실상을 드러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사실 천국에 순서라는 것은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하나님의 택한 자로 태어난다면 그 사람은 이미 천국에 속한 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먼저 들어가고 나중 들어가는 순서란 없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장로들의 입장에서는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라는 것이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은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형편없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과도 거리가 먼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도 그들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그들이 자신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제사장과 장로들이 세리와 창녀보다 더 못한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제사장 장로들의 실상이었습니다.

 

 

◉ 아버지의 뜻 ◉

 

 

맏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가겠다고 대답은 하였지만 결국 가지 않았습니다. 이 맏아들이 제사장과 장로들을 가리킨다면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실천하겠다고 대답을 하면서 실상은 말씀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반면에 둘째 아들이 세리와 창녀들을 가리킨다면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도 없고 그대로 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지만 결국 그들은 뉘우치고 말씀대로 행한 자가 됩니다.

 

 

제사장과 장로들은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은 맏아들에 해당된다면 그들이 행해온 모든 실천과 행함은 실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는 뜻이 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말씀을 문자대로 실천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의 의미는 다릅니다. 제사장과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신 세리와 창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대로 실천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제사장과 장로들 방식의 신앙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들이 제사장 장로들과 다른 것은 자신을 의로운 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의로운 자로 여기기는커녕 회개하고 용서 받아야 할 자로만 여겼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제사장이나 장로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외적 조건은 없습니다. 외적 조건이라면 제사장과 장로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누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조건과 기준들을 모두 무너뜨리는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라는 말씀 앞에서 기존의 신앙 기준과 원칙들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준으로 하는 새로운 신앙기준과 원칙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회개와 용서의 세계입니다.

 

 

회개와 용서는 우리에게는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익숙하고 당연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회개와 용서와는 거리가 먼 자로 살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마치 날마다 회개하면서 예수님의 용서를 믿고 살고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회개와 용서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부터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바리새인 식으로 ‘나는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세요’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회개와 용서의 세계를 살고 있다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회개와 용서의 세계에는 세리와 창녀들이 모여 있습니다. 자신을 의로운 자로 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권위도 권세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의 사람들이고 그들도 스스로를 그렇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내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까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원하시는 것은 회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한 용서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하나님 백성의 참된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으로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놓친다면 우리는 제사장이나 장로들과 같은 실상을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두 아들의 이야기는 포도원으로 일을 하러 갔느냐 가지 않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뉘우친 자가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뉘우침이 곧 둘째 아들을 포도원으로 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물론 말씀과 기도가 중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말씀과 기도가 회개가 아닌 자신을 채우고자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말씀과 기도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에게서 멀어질 가능성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말씀이나 기도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문제가 예외가 아닙니다. 그 어느 것도 내 자신을 만족케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이 밑이 터진 웅덩이와 같음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실상임을 깨닫게 해서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감사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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