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5.15 14:04

(137강) 세금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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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15-22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21522.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설교>

 

◉ 세상속의 신자 ◉

 

 

신자 즉,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되어집니다. 사도의 말처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될 수 없는데 그리스도의 영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치시기 위해 보낸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본인 스스로의 선택이나 노력과는 무관한 것이고 신자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이 같은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 안에는 본인 스스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를 선택한 후 주일이면 교회에 나가 예배드리고 말씀을 배우면서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는 그 모든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포함되어 있는 것은 다만 창세전에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시며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하시고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과 능력일 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그 모든 일하심을 증거하고 찬송해야 할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그리스도인 됨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바른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인다움을 세상에 보여주고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과의 관계에서 갈등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세상의 질서와 요구에 순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질서와 요구가 만약 기독교 신앙에 배치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과 싸워서 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비록 기독교 신앙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해도 세상의 질서와 요구에 순응함으로써 좋은 평가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까?

 

 

세상은 기독교 신자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켜 갈수 있도록 배려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펼치지 않습니다. 오직 국가의 이익만을 추구할 뿐이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은 종교와 신앙을 초월하여 국가의 정책에 반대해서는 안된다는 입장만을 고수할 뿐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선한 삶을 실천하여 어떤 경우에도 신자는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신자를 세상에 있게 하신 이유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러한 삶의 방식이 오히려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결국 짐으로 지워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세금 문제로 올무를 놓다 ◉

 

 

오늘 본문은 이러한 짐을 지고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이 짐으로 여기고 있는 문제를 예수님께 던짐으로써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고 자신들은 그 문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15절에 보면 예수님의 세 비유에 등장하는 맏아들과, 포도원의 악한 농부, 그리고 임금의 잔치에 청함을 받고도 자기 일 때문에 거절한 사람이 모두 자신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된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상의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들의 잘못됨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기 위해 상의를 했다는 것은 인간은 본연의 양심과 윤리성을 바탕으로 자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못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에게 보냅니다. 헤롯 당원은 유대인으로써 헤롯 왕조를 추종하고 지지한 사람을 일컫습니다. 때문에 헤롯 당원은 유대 사회에서는 반역자와 같은 존재로 취급받았으며 당연히 바리새인과 헤롯 당원과의 관계도 좋을 수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볼 때 헤롯 당원은 하나님과 민족에 등을 돌린 배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을 헤롯 당원과 함께 예수님께 보냅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세금 문제를 관할하고 있는 헤롯 당원을 함께 예수님께 보냄으로써 그들이 작정한 말의 올무에 예수님이 걸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은 먼저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16절)라고 찬사를 늘어놓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올무를 회피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는 분으로 말함으로써 자신들의 질문을 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아무도 꺼리지 않는 분으로 말함으로써 뭔가가 두려워서 답을 회피하지도 못하게 하고자 하는 수작인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찬사는 예수님을 자신들의 올무에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술수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17절)라고 묻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에는 이 같은 질문이 전혀 곤란하지도 어렵지도 않은 문제일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신자가 세금을 바쳐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라는 문제로 고민하고 갈등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신자도 국가의 국민이기 때문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으면서 목사도 세금을 바쳐야 한다는 것으로 논란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사회는 달랐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으로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이방인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은 아주 굴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거두는 세리가 어떻게 보였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 세리를 창녀와 같은 존재로 취급을 한 것입니다.

 

 

세금 문제를 질문하는 바리새인의 의도는 뻔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다고 하면 세금 바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유대인들로부터 반감과 미움을 받게 될 것이고, 옳지 않다고 하면 함께 동행한 헤롯 당원들로부터 반감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한다고 해도 어느 한쪽으로든 미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세금을 바치라고 할 수도 없고 바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교묘하게 말의 올무인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에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답은 ‘바치라 할 것인가 바치지 말라 할 것인가?’일 것입니다. 때문에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주일에 국가에서 치르는 시험을 쳐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시험을 쳐야 한다고 하면 주일 성수를 무시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고 치지 말라고 하면 결국 국가 공무원이나 국가에서 발행하는 자격증 등을 모두 포기해야 하는 사태가 발생하기 때문에 신앙과 현실이라는 문제에서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는 곤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로 고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가 곧 ‘신앙이냐 현실이냐’라는 갈등을 야기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의도도 예수님을 이러한 갈등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

 

 

예수님은 이 문제를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으로 해결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갈등할 수 있는 ‘신앙이냐 현실이냐’라는 문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으로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겐 여전히 의문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이 가이사의 것이고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시 세금으로 바치던 동전 데나리온 뒷면에는 가이사의 어머니 리비아가 평화의 여신 모습으로 주조되어 있었고, 앞면에는 가이사의 형상과 함께 ‘신적인 아우구스도의 아들, 가이사’라는 글씨가 새겨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동전을 보이시면서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고 묻자 가이사의 것이라고 답한 것입니다. 그러면 가이사의 것이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진 데나리온을 말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진 동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데, 과연 무엇을 하나님의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까?

 

 

어떤 사람은 가이사의 것은 신자가 국민으로써 행해야 할 납세 의무를 가리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은 신자로써 행해야 할 십일조 의무를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신자로써 성실히 세금을 납부하고 또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참된 신앙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금과 십일조를 제외한 나머지는 나의 것입니까? 이처럼 행위를 신앙과 신앙이 아닌 것으로 구분하고, 자신에게 있는 것 역시 나의 것과 나의 것이 아닌 것으로 구분하며 행동함으로써 삶이 신앙과 현실이라는 이원론으로 나눠지게 됩니다. 이러한 이원론적 구조에서 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라는 갈등이 끊임없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행하지 않으면 자신의 신자 됨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행하지 못하는 것은 그 행함이 현실에서는 불이익으로 연결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냐 현실이냐는 이원론적 구조에서 하지도 할 수도 없는 고민과 갈등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아마 신자로써 신자 됨을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고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동전에 가이사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것은 가이사가 다스리고 있다는 증표입니다. 즉 데나리온을 화폐로 사용한다는 것은 가이사가 다스리는 세상을 살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가이사가 세금을 요구하는 것은 세금이 있어야 자신의 나라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이사가 세금을 요구한다면 고민할 필요 없이 바치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것으로 부름 받아 하나님의 백성된 신자는 가이사에게 속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는 세금을 거둬서 국가를 유지하려는 가이사의 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됨은 세금을 바치고 바치지 않는 것으로 증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이사는 세금을 거둬서 자신의 나라를 유지하려고 하는데, 만약 세금을 거부함으로써 신자라는 자기 신앙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가이사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가이사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존재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입니다.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만 존재 가능한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으로써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은 재물이나 우리의 수고와 노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쳐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는 나를 존재케 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과 전지전능하신 능력입니다. 세상의 것을 동원하여 나를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 능력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에 매이지 않는 자로 사는 것이 신앙과 현실이 하나 된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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