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5.29 16:52

(139강) 큰 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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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2:34-40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23440.mp4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설교>
 

◉ 크고 첫째 되는 계명 ◉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그들이 생각하는 부활사상의 논리적 모순의 문제를 질문했던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의 답변에 놀라면서 더 이상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 자리에 모여든 바리새인들 중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질문을 합니다. 그것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는 것입니다.

 

 

율법사는 율법에 대해서는 전문가입니다. 그들은 아마 예수님이 자신들처럼 율법에 대해서는 전문가도 아니며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 조항만 해도 수백 가지가 넘는데 그 가운데서 큰 계명이 어느 것인지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예수님은 주저하지 않고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답변하시고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답변에 대해 율법사 역시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된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보다 더 실력이 출중하다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즉 율법사들은 전혀 알고 있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이 답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눅 10:25절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되묻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때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라고 답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는지 물으면 우리는 쉽게 십계명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지 말고 안식일을 지키고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하지 말고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등의 신자가 꼭 실천해야 한다고 여기는 율법 조항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제사 규례나 안식일 규례 등은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율법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율법으로 답하는 것은 매우 뜻밖입니다. 마치 제사 규례나 안식일 규례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처럼 누가복음에서의 율법에 대한 율법사의 답을 보면 당시 율법사들도 율법에 있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가장 크고 중요한 계명으로 여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니면 이 율법사가 율법의 의미를 좀 더 바르게 알고 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본문의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 사람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답을 보면서 예수님이 그들보다 더 실력이 좋다는 식으로 읽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 하나님의 진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

 

 

질문하고 답하는 내용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누가 더 성경을 많이 아는가?’라는 실력의 차이가 아니라 성경, 즉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참된 진의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입니다. 말씀의 참된 진의를 모른다면 제아무리 말씀의 내용을 꿰고 있고 그 내용대로 실천을 한다고 해도 결국 말씀의 진의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인들의 형편이었고 오늘날의 교회의 형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대로 산다고, 또 살겠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정작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진의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것은 분명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말씀을 지키고 순종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의를 모른 채 성경을 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문제로 질문한 사람들도 가이사에게 세 바치는 것을 마치 가이사를 신으로 섬기는 것처럼 여겼고 그래서 매우 껄끄러운 문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에 대한 하나님의 참된 진의를 알지 못한 그들의 낮은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참된 진의 속에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이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친다고 해서 가이사를 섬기는 가이사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것으로 소유된 위치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인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 말씀의 진의라는 것입니다.

 

 

◉ 사랑을 실천할 능력이 없는 인간 ◉

 

 

그렇다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으로 말씀하시고 둘째를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것으로 말씀하신 예수님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단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니까 그대로 지키고 실천하라는 의미로 하신 말씀일까요?

 

 

그렇다면 그것은 율법에 대한 바리새인의 사고방식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율법에 대한 바리새인의 사고방식은 지키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누가복음에 등장한 율법사의 질문에서 예수님은 율법사가 말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문제를 행하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이 과연 사랑이라는 계명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사랑을 실천하면 영생을 얻는다는 의미일까요?

 

 

이 율법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기 위해 이웃이 누구인가를 물었고 그것이 곧 말씀의 진의를 깨닫지 못한 물음인 것입니다. 이웃이 누구인가를 알려주면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주었고 강도 만난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 이웃이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등장인물을 바꾸어 생각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까요? 즉 사마리아 사람을 강도만난 사람으로, 율법사를 강도를 구해주는 사람으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 경우 율법사가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 강도 만난 사마리아 사람을 구해준다면 그것은 부정한 것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이 됩니다. 즉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계명을 어겨야 하는 딜레마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결국 계명, 즉 행함과 실천으로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 참된 진의가 살아있는 말씀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본문의 말씀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로 접근하는 것을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것은 온 율법과 선지자가 외쳤던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비록 표면적으로 율법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다고 해서 사랑에서 벗어나 있다면 율법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실천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 외에는 사랑의 대상이 없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마음과 목숨과 뜻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집중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자신까지도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랑에 대해서도 질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랑에 대해 사람들은 반발할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까지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또한 하나님 사랑은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그 비중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에 대해 우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습니다. 즉 감히 실천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뜻 ◉

 

 

이처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고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면 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당연히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 앞에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죄인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계명을 실천하여 말씀에 순종하고자 한 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진의를 알지 못한 결과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잘못된 신앙이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 몰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사랑할 능력이 없다는 말을 하면 ‘그럼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냐?’라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지만 도대체 어떻게 사랑하겠다는 것인지 저는 그것이 의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대로 사랑할 수는 없지만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면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관계로 개선될 수 있지 않느냐?’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사랑하려고 애를 쓴다면 좀 더 나은 관계로 개선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개선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역시 하나님의 진의는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계명을 주신 진의는 인간관계의 개선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계명을 주신 하나님의 진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랑의 의미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롭게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신자가 예수님의 피 흘리신 은혜를 알고 은혜에 대한 감사함이 있다면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든 예수님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비록 힘든 처지라고 해도 나의 죄 때문에 피 흘려죽으신 예수님으로 감사하고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 역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모습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한 예는 죄인이라는 낮은 자리에서 이웃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높임을 받을 사람과 높일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기쁨으로 예수님을 높이고 찬송하는 죄인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기에 우리가 실천해야 할 문제로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를 십자가에 확증된 주의 사랑에 붙들어 놓을 것이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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