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8.23 09:54

(101강) 영광을 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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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5:29-31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52931.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29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30 큰 무리가 다리 저는 사람과 장애인과 맹인과 말 못하는 사람과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앉히매 고쳐 주시니

31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설교>

 

◎ 성경은 나의 이야기 ◎

 

본문은 예수님이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앉으시자 큰 무리들이 여러 장애인을 데려와 예수님 앞에 앉히매 예수님이 그들을 고치시고, 무리가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은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이 병자와 장애인들을 고쳐주신 수많은 일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의 사건 중의 하나로 여기고 그냥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이 위치한 성경의 구조를 살펴본다면 본문을 단순히 병자나 장애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이적 중의 한 내용으로만 보고 지나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지만 복음서에 기록된 병자나 장애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기적들은 단지 육신의 질병이나 장애를 고쳐주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로 오셨고, 오셔서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지금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말하면서 질병이나 장애가 고침 받는 기적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육신에 득을 보고자 하는 욕심이 앞서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육신은 그 어떤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도 결국은 죽고 흙으로 돌아갈 몸뚱이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육신이 기적을 경험함으로써 흙이 아닌 다른 존귀하고 가치 있는 몸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가령 나사로는 예수님에 의해서 죽었다가 다시 사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고 해서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도 결국은 죽었고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 다른 사람과 똑같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죽었다가 다시 사는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에 믿음 없이 천국 가는 일은 없습니다.

 

 

병자가 고침을 받는다고 해서 평생 병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중한 병에서 기적적으로 고침을 받았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천국 가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적과 같은 경험들을 간증이라는 명목으로 쏟아내고 있지만 결국은 남들은 하지 못한 놀라운 경험을 한 자기 자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고쳐주신 수많은 병자와 소경, 귀머거리, 귀신 들린 사람, 그리고 여러 장애인들이 등장합니다. 그 내용을 말씀드릴 때마다 제가 빠지지 않고 언급했던 것은 우리가 바로 병자고 소경이고 귀머거리며 귀신들린 사람이고 장애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성경의 내용이 바로 여러분 자신의 내용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멀쩡하고 질병도 없이 건강한데 우리가 병자고, 소경이고 장애인이라면 그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라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이 병자고 장애인이라는 인식이 있게 되면 예수님이 우리를 고치러 오신 분이고, 또 고쳐주셨다는 것으로 감사할 수 있고 본문의 무리들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장애를 고치신 기적의 의미 ◎

 

 

제가 본문을 보며 깊이 생각해 본 것은 장애인이 고침 받은 것을 본 무리들이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내용입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순간 생각하게 된 것은 ‘과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이고, 여러분 스스로도 그러한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는 말을 하면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무리들의 어떤 특별한 행동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특별히 어떤 행동을 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거나 영광이 되었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영광을 돌리는 것을 특별한 행동과 연결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일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어떤 행동을 함으로써 되는 것이 아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일까요? 이것을 알려면 본문의 의미부터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본문을 앞서 말한 것처럼 인간이 장애를 고쳐주신 일로만 본다면 결국 영광을 돌리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에 대해 놀라워하고 예수님을 능력이 있는 분으로 믿고 높이는 것으로 오해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의미는 마태복음의 흐름을 따라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먼저 14장에서는 오병이어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15장에서도 오병이어 사건과 거의 같은 칠병이어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다음 주일에 그 내용을 말씀드리겠지만 왜 마태는 거의 같은 기적의 사건을 다시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을까요? 거의 같은 기적의 사건이기에 같은 의미로 해석된다면 반복해서 기록할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이러한 의문은 마태복음의 흐름을 통해서 해소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은 볼품없는 조건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이 세상을 배부르게 하는 생명의 떡으로 오셨고, 그 떡을 제자들을 통해서 나누어 주시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 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지심으로써 새로운 시대는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실천하여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시대가 아니라 생명이신 예수님이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며 죽음에서 건져주시는 시대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15장에서는 먼저 장로들의 전통을 중시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등장시켜서 인간이 불들고 있는 잘못된 신앙은 자신의 더러움을 알지 못하고, 어떤 특정한 행동으로 깨끗한 자로 여김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임을 드러내시고, 이어서 이방여인을 통해서 참된 믿음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는 자신이 개로 여김 받아도 괜찮으며, 부스러기라 할지라도 주님으로부터 떨어지는 은혜를 구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아는 신자의 믿음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의 사람을 참된 이스라엘로 세상에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악함과 더러움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의가 고개를 들 수밖에 없고, 그것은 곧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잊게 하는 원인이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장애인을 고치신 사건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본문은 이방여인의 그 믿음이 인간이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은 모두 장애인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육신이 정상이 아닌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고침을 받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장애는 육신의 장애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육신에 장애가 있는 사람을 예수님 앞에 세움으로써 예수님 앞에 선 모든 인간이 장애인이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사실 인간은 모두 정상이 아닙니다. 육신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하신 그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의 영혼은 병들었고, 참된 것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고, 진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며, 우리를 살리는 믿음의 길을 가지 못하는 앉은뱅이고 절름발이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우리를 고치시기 위해서 주신 믿음은 바로 이방여인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장차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생명이 되심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장애인으로 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을 의심해 봐야 합니다. 내가 장애인임을 생각하지 않을 때 나를 고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처럼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 예수만을 기대할 것입니다. 적당한 선행과 도덕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포장하여 믿음이 있는 신자인 척 하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없습니다.

 

 

◎ 하나님께 영광 돌림 ◎

 

 

그러면 신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어떤 사람은 열광적으로 찬송을 부르면서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외치기도 하고,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수상 소감을 말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영광은 그런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영광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선행을 해서 칭찬을 받으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선행으로 칭찬을 받는 사람은 신자가 아니라도 많습니다.

 

 

본문의 무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특별히 행한 행동이 없다고 했습니다. 즉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은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으로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장애인들을 예수님께 데려온 무리들은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고 장애인이 온전하게 되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맹인이 보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들이 놀라움이 단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놀라움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수준의 놀라움이라면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무리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것은, 장애인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일을 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생각했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없을 것이니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무리들은 장애인을 고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들을 고치시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로 여긴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 돌린 것으로 얘기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야곱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은 천사와 씨름을 하다가 절름발이, 즉 장애인이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이란 이름은 천사에 의해 절름발이가 된 후에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절름발이의 후손이라는 뜻이 됩니다.

 

 

야곱은 모든 축복의 근원을 땅에서 찾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이 야곱의 뜻을 꺾으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그를 인도하는 것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것을 야곱의 환도뼈를 꺾어 다리를 절게 하심으로써 배우게 하신 것입니다.

 

 

야곱처럼 우리 역시 축복의 근원을 땅에 두고 살아갑니다. 천국을 말하면서도 마음을 항상 세상을 향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장애인이라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뜻을 꺾으시고 다스리시며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참된 생명이 되게 하시고 우리에게 함께 하게 하셨습니다.

 

 

과연 축복의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는 바로 생명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축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방여인의 믿음이라면 예수님이 나를 다스리신다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고침 받은 마음입니다.

 

 

인간의 장애는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흠없는 완전한 자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러한 일에 놀라워 할 뿐이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신자의 믿음은 예수님을 알고 자신을 알게 됨으로써 더욱 풍성해 집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분별하게 할 것입니다. 신자에게 분별력이 있다면 자연히 옳고 그름을 분별하면서 믿음의 길을 가고자 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행하라’는 말이 사실 불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그에게 항상 외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약 목사의 ‘행하라’는 말에 의존하고 순종함으로써 행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믿음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또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을 아십니까? 예수님께 데려온 장애인을 고쳐주신 예수님을 아십니까? 아신다면 예수님이 장애인인 여러분께 주신 것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주신 그것을 받아먹으며 진리의 길을 가게 된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신자로 사는 것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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