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9.20 22:23

(105강) 나를 누구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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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6:13-17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6131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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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설교>

 

◎ 인간은 욕망에 지배를 받고 있다 ◎

 

세상이 알고 있는 예수님과 신자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인간의 욕망의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며 어떤 존재인가를 판단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말미암아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알고 있고 고백하는 예수님에게는 인간의 욕망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문제를 해결해주고, 세상의 복을 주고, 고통에서 벗어나 편히 살게 하시는 예수님으로 알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자신을 보게 된 결과입니다. 지금의 나보다도 하나님처럼 된 내가 더 좋게 보인 것입니다. 이것을 욕망이라고 합니다. 욕망의 눈에 비친 선악과는 그때부터 다르게 보입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로 보인 것입니다.

 

 

 예전의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 아래 있음을 알게 하는 나무였지만, 자기 영광이라는 욕망이 지배한 순간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자신을 지금보다 더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줄 유익한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자신을 보게 된 순간부터 욕망의 지배를 받고 살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 우리입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세상을 자기 영광이라는 욕망을 기준으로 해서 보고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은 선한 것이고, 해로운 것은 악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욕망의 눈으로 예수를 바라본다면 예수는 어떤 존재로 여겨질까요? 세상이 생각하는 신은 인간에게 득이 되는 존재입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주고,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고, 고통을 평안으로 바꾸어 주기 위해 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 신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일뿐입니다. 그래서 자기 영광을 위해 선악과를 먹은 것처럼, 자신을 위해 신을 선택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눈에는 예수님도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또 다른 신일뿐입니다. 문제와 고통이 있는 사람에게는 해결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존재로 보일 것이고, 도덕과 윤리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인류의 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희생정신을 보여주신 분이고, 세상은 그런 분을 본받아서 남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는 정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존재로 여길 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예수는 구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심리 안정에는 도움이 조금 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는 그 어떤 구원의 능력도 될 수 없는 다른 예수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누구로 아느냐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한 대로 인간은 욕망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보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든 것은 욕망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욕망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도 판단도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영광이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이 곧 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원하는 예수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그 예수가 아닌 다른 예수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 예수님은 선지자로 보는 사람들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14절)라고 답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 보였고, 어떤 사람에게는 엘리야로, 어떤 사람에게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였습니다. 세례 요한이나 엘리야나 다른 선지자가 각기 다른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내신 위대한 인물들이었고 능력자였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서 능력을 확인했고, 그 능력을 근거로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와 같은 능력자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베드로의 고백을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고백으로 인정하시면서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아는 사람들의 시각은 혈육으로부터 나온 것이고 예수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선지자와 같은 존재로 알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서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기 위해 오신 분인가를 본 것이 아니라 단지 신적인 능력만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와 같은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증거하실 때 말씀으로도 하셨지만, 기적을 통해서도 증거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을 보고 날씨는 분별하면서도 시대의 표적을 분별을 하지 못하고 하늘로써 오는 다른 표적을 구합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표적으로 예수님을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은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시켜 줄 위대한 존재였기 때문에 그들이 보고 확신할 수 있는 분명한 표적이 필요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메시아를 통해서 자기 영광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시는 그 의미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예수님이 구원자로서 하시는 일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아서 예수님을 모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기대하고 보고 싶은 것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이 누구신가를 보여주신 일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그들의 눈에는 능력이 있는 선지자처럼 보였을 뿐입니다.

 

 

육신에 매어 있는 인간에게 병을 고치시고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은 육신에 도움을 주는 능력자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육신에 도움을 주는 예수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답할까요? ‘당신은 우리의 어떤 병도 낫게 하는 능력자이십니다’라고 답하기도 할 것이고, ‘당신은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주입니다’라는 답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영광에 매어 사는 인간의 욕망이 기대하는 예수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로 알고 있는지 물으시고 제자들에게도 같은 물음을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믿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여러분께 ‘당신은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마치 대학생에게 1+1을 묻는 것처럼 오랫동안 예수를 믿어온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예수님과 세상이 알고 있는 예수가 다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은 분명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알고 있고 말하는 예수가 여러분이 알고 있고 믿고 있는 예수와 다르지 않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시겠습니까?

 

 

물론 얼마든지 베드로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학생이 선생님에게 배운 답을 암기하여 말하는 수준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고백이 어떤 의미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그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을 때 그 믿음이 신자의 생각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 베드로의 고백 ◎

 

 

베드로는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로 고백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베드로의 고백은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수님에 대해 같은 말을 할 것이고, 또 베드로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베드로에게는 우리처럼 성경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고백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직 베드로가 홀로 깨달아야 하는 문제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단지 능력자로 보는 세상의 시각과는 다른 고백을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면서 큰 능력을 가진 선지자와 같은 사람으로 바라봤지만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는 예수님이 행하신 일에서 능력을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 분인가를 봤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병을 낫게 하시고, 장애인을 고치시고,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이 악에 빠져 살아가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이 어떤 일을 위해 오셨는가를 아는 자의 고백입니다. 죄에 갇힌 인간을 자유하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시는 분으로 오셨다는 것이 ‘주는 그리스도’라는 고백에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라는 고백에는 자기 영광을 구하는 욕망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복을 주시고, 출세하게 하시고, 병을 낫게 하시는 예수님을 기대하는 욕망이 담겨 있지 않은 고백이 그리스도입니다.

 

 

만약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면서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욕망이 살아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아는 신자의 참된 고백이 아닙니다. 단지 교회에서 듣고 배웠기에 말하게 되는 지식의 수준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성인 중의 하나로 보는 세상의 시각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 또한 대단한 고백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라면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은, 말 그대로 믿음의 문제입니다. 지식의 수준이 아니란 것입니다. 믿음의 문제라는 것은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들이 요구하는 것처럼 하늘로부터 온 어떤 표적을 통해서 확인하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란 뜻입니다.

 

 

기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서 나타난 예수님의 일을 믿는 것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나타난 예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눈에 보이는 것으로 믿음의 문제나, 성령의 역사를 확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된 것이라면 예수님을 선지자로 보는 사람들과 같은 시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기적을 보지 않고 기적을 통해서 증거되는 예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17절)고 말씀합니다.

 

 

무엇이 복이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을 하게 된 것이 복입니다. 육신의 이득이나 영광과 상관이 없는 복입니다. 세상이 전혀 생각하지도 기대하지 않은 복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믿음은 혈과 육으로부터 나올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가난해도 복이 있는 사람이고, 초라한 몰골이라고 해도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알고 자신을 복 있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는 것 또한 복 있는 것이겠지요.

 

 

보이는 것으로 자신을 확인하려고 한다면 자신의 잘남을 복으로 여기게 됩니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신비한 일을 통해서 믿음을 확인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이 없으면 자신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믿음과 상관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께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리스도이십니까? 그렇다면 그 그리스도는 또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믿음의 근거가 여러분의 지식이나 체험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삶 또한 지식이나 체험을 좇아서는 안됩니다. 눈으로 보고 체험하고자 하는 것은 사단의 유혹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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