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10.04 09:33

(107강) 하나님의 일, 사람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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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6:21-23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6212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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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설교>

 

사람은 특별하다고 여겨지는 뭔가를 눈으로 확인하고 경험하게 되면 자신이 확인하고 경험한 것만을 의존하려는 성향을 갖게 됩니다. 그러한 성향은 어떤 견고한 이론도 받아들이지 않고 밀쳐내면서 보이는 물질적인 것과 성과적인 것에 큰 비중과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성향 속에서 믿음과 성령과 은사 등 모든 것을 바라보고 인식하기 때문에 평범하고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됩니다.

 

 

본문의 베드로에게서 이러한 성형을 볼 수 있는데,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을 하고 예수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제자들은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고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굉장한 일을 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이적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바람과 풍랑까지도 다스리시는 능력의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분이 자신들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 시시한 것은 아닐 거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다음의 말은 제자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21절에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라는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면 당연히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다윗 자손으로 오신 왕으로서의 환영과 높임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제자들이 가질 수 있는 당연한 기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실 것이라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합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교회를 세우실 예수님이 죽어버리면 누가 교회를 세워야 합니까? 이런 점을 생각하면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죽어서는 안되는 분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에 대해서도 말씀을 했습니다. 죽은 분이 다시 살아난다면 그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또한 그것으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 더 확실히 증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자들은 부활을 몰랐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세상의 상식을 벗어난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말은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며 항변합니다. 베드로는 강력하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말립니다.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설사 예수님에게 그런 일이 닥친다고 해도 자신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항변에는 예수님에게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는 강력한 항거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죽어 버리면 자신들의 기대와 꿈은 무너져 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항변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가는 예수님의 책망에서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절)라고 책망하십니다.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하신 것은 베드로를 직접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만약 베드로를 직접 가리켜서 사탄이라고 하셨다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사탄이 한 것이 되고, 예수님은 사탄이 한 고백을 인정하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신 결과가 돼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항변하면서 만류하는 사고방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은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셔야 하는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입니다. 그래서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베드로의 말이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셔야 하는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됩니까? 이것이 베드로가 사탄으로 불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하는 열쇠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은 무엇이며 사람의 일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강력하게 만류하는 것은 고난과 죽음은 곧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왕으로써 높임을 받고 모든 영광과 존귀를 누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승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러한 영광스러운 승리를 누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장로들과 대제사장,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신다면 그것은 패배인 것이고,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그러한 패배의 길을 가는 것을 제자들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제시한 것은 세상의 영광과 부귀 영화였습니다. 즉 승리자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제시하여 고난과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만류한 것이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과 같았기 때문에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는 말을 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 즉 메시아는 위대한 승리자였습니다. 제자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피조물에 지나지 않은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유대인들은 오직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지금도 로마에 의해서 억눌리며 살고 있는데, 고난을 받고 죽음의 길을 가기 위해 오신 메시아는 그들로서는 절대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강력하게 만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는 또 어떻습니까? 과연 무엇을 삶의 목표로 하고 있습니까? 바로 승리입니다. 이기기 위해 살고 이기는 길을 가기 위해 발버둥 칩니다. 타인보다 뒤처지는 것은 패배하는 것이고 그것은 믿음의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대 교회는 오직 승리의 길을 가기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합니다. 하나님의 뜻, 믿음의 역사, 성령의 능력, 기도의 응답, 은사 등등, 교회가 언급하는 모든 것은 승리와 연관되어 해석되고 외쳐지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에 매어 있는 것도 성장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이고, 승리가 곧 하나님이 도우시고 역사하신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의무적인 일이었을 뿐,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일로 여겨버립니다. 고난을 말하고 십자가를 말하되 그것은 관념적인 것일 뿐, 정작 구하는 것은 승리였던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부활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죽음을 외면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사고방식이 현대 교회가 말하는 신앙에 접목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두말할 것 없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에 해당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의도가 예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해도 예수님으로부터 거절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성경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생각했던 그리스도의 일은, 앞서 말한 대로 승리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순전히 예수님의 승리를 원했다기보다는 예수님의 승리로 인한 자신들의 승리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그들에게는 패배로 다가오는 것이기 때문에 만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사람의 일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즉 사람의 일이란 자기 승리를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목으로 수없이 많은 일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람의 일을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신앙의 중심에 두어야 할 중요한 문제로는 여기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얘기하면 기독교에는 부활의 승리가 있다고 하면서 한쪽에 치우치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부활의 승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릅니다. 부활의 승리는 죽음을 이긴 승리이기 때문에 부활의 승리를 누리는 신자는 죽음과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길을 가게 된다는 것을 모릅니다. 다만 사람이 생각하고 사람이 원하는 세상적 승리를 부활이라는 말에 갖다 붙여 사용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으시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참 생명을 세상에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신자는 하나님의 일의 증거물로 세상에 나타나게 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승리, 우리가 원하는 승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승리를 선포할 자로 존재합니다.

 

 

만약 자신의 승리를 목표로 한다면 그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은 예수님이 가신 길일 뿐 자신은 다른 길을 바라보게 됩니다. 롯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분명히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된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신자는 예수님이 가신 길이 무엇인가를 살피면서 그 길이 곧 하나님이 자신을 인도하실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승리하는 것이 자신이 사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패배는 곧 죽는 것과 같습니다. 남을 이겨야 내가 살 수 있는 것이 세상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부흥도 내가 살기 위해서 외치는 것이고, 기도 응답을 원하는 것도 결국 내가 살기 위한 방편으로 여깁니다. 이처럼 내가 살기 위해 하는 모든 것이 사람의 일에 해당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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