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10.11 11:11

(108강) 나를 따르려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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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6:24-26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6242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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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설교>

 

◎ 생존을 위한 삶 ◎

 

사람의 활동은 자기 생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밥을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직장을 다니고 학교를 다니고 사람을 사귀고 종교를 선택하는 것까지 모든 것들이 자기 생존을 위한 활동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누구나 살기 위해서 사는 것이지 죽기 위해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살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죽음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또는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자존심과 체면을 지키기 위해 죽음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며칠 전에 ‘행복전도사’로 불리면서 활동을 하던 최윤희라는 분이 남편과 함께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행복전도사’로 불리던 사람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고, 허망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분은 그분 나름대로 자기 행복을 위해 죽음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뿐입니다. 그분에게는 질병으로 인한 극심한 고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행복이었을 것이고, 결국 행복을 찾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살기 위해 죽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데모를 합니다. 데모의 대상은 국가일 수도 있고 회사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토지 보상 문제로 데모하고, 어떤 사람들은 쓰레기 처리장 설치 반대를 위해 데모합니다. 어떤 사람은 회사의 부당한 해고에 대해 데모하고, 어떤 사람은 월급을 올려 달라고 파업을 하면서 데모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명목으로 데모를 하고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그 모든 데모가 인간의 생존과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고난을 받고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항변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데모를 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항변은 예수님이 말씀한 고난과 죽으심이 자기 생존과 연관이 있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의 죽으심은 예수님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자신들의 생존과도 연관된 것이기에 항변을 하면서까지 말렸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게 되었고, 멀지 않은 시기에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의 나라를 이루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스승인 예수님이 메시아의 나라를 이룬다면 제자인 자신들에게는 수많은 혜택이 주어질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죽어 버린다면 모든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릴 것이고, 그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고생 했던 세월 또한 헛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리하지 말라고 항변을 한 것입니다.

 

 

 즉 자신들을 위해서 고난 받고 죽는다는 것을 취소해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항변은 자기 생존과 연관된 것이었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하심으로써 사탄의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 ◎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24절)고 말씀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실까요?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헛된 생각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부르면서 예수님을 따르고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제자들과 같은 헛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사람만이 예수님을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 답은 25절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자기 생존을 위해 활동합니다. 신을 찾는 것도 자기 생존을 위해서입니다. 생존은 단지 육신이 살아있는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가 원하는 자기 인생을 이루는 것, 즉 성공을 이루고 편안하고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이 인간이 꿈꾸는 생존입니다. 신을 찾아서 건강을 기원하고 행복한 삶을 기원하는 그 모든 것이 자기 생존을 위해 신을 찾는 것입니다.

 

 

말한 대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자기 생존을 기대했습니다. 메시아 나라가 이루어지면 제자인 자신들에게도 그에 합당한 보상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을 위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부인은 바로 자기 생존을 위해 예수님을 찾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라는 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 내 육신을 위해서, 내 인생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지 않는 것이 자기 부인이고, 자기 부인이 없이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이 말씀을 오늘 우리는 깊이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예수님을 부르지만 그 중심에는 ‘나’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부인이 없이는 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생존을 향한 인간의 욕망과는 전혀 다른 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성공을 위해 살고, 성공해서 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세상이 볼 때는 낮아지고 실패하고 영광은커녕 조롱과 무시를 받을만한 보잘것없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 없이는 그 누구도 예수님이 가신 길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것을 뜻합니다. 흔히 자식이 속을 썩이면 자식이 십자가라고 하고, 남편이 힘들게 하면 남편이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한 십자가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신자가 져야 할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이 죽고자 한다면 그는 분명 세상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다른 사고방식, 다른 가치관으로 바뀌지 않고는 살고자 하는 욕망을 초월하여 죽고자 하는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에서는 소위 ‘긍정적인 믿음’이 널리 선전되고 있습니다. 긍정의 힘과 효과를 말하면서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라고 선전합니다.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믿음에는 자기 생존을 향한 강한 집착과 욕망이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 부인이 아닌 자기 긍정의 사고로 예수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믿음의 길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긍정적인 믿음이 마치 성경적이고, 참된 믿음인 것처럼 다가오는 것은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 부합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전혀 다릅니다. 무엇보다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부합되지 않는 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을 듣고 있으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고, 힘이 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 없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고 따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은 자신의 착한 행동과 교회에서의 열심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복을 받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응답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이 모든 것이 자기 긍정의 사고방식입니다. 나에게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가 되지 못한다는 자기 부인이 없습니다.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믿음을 지키면서 자기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현실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현실을 말씀합니다. 그것이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신다는 십자가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원하고 기대하는 현실이 무너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죽으심의 길을 항변하며 만류합니다. 베드로의 이같은 생각과 반응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 우리도 복음에 대해 이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 잃으면 찾으리라 ◎

 

 

오늘날 현대인들의 믿음의 세계는 원하는 것을 찾고 손에 쥐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사람의 일입니다. 결국 믿음을 말하고 복음을 말하면서도 정작 자기를 위한 사람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 현대 기독교의 실상인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한 믿음의 세계는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거부하고 싶은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지만 살고자 하는 것 자체가 악이라는 것을 깨달은 신자라면 주를 위해 죽는 것이 신자의 본분임을 알 것이고, 또한 그것은 영원히 죽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을 찾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실제로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형편과 상황에 따라서 예수님을 위해, 즉 복음을 위해 육신의 목숨을 잃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신자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한 대로 형편과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잃는 것은 내 목숨보다도 예수님이 더 귀하다는 것을 알 때 가능합니다. 목숨을 잃어도 될 정도로 예수님이 귀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참된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주를 따르게 합니다. 목숨보다 귀한 주님이 내게 함께 하시는 것을 진정한 현실로 여기면서 더 이상 구할 것이 없는 신자로 사는 것이야 말로 자기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누가 이런 삶을 위해 예수님을 찾겠습니까?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신앙의 세계고, 거부하고 밀쳐 내고 싶을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고 다시 사심으로써 우리에게 이루시고자 하는 생명의 세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존에 집착한 채 세상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안달인 우리들에게 진심으로 영원히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26절)는 말씀처럼 인간에게는 목숨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숨이 온 천하를 얻는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이 아닙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는 것이 인간입니다.

 

 

사람들은 온 천하를 얻고 그 영광과 부귀영화를 누리는 목숨, 생존을 꿈꿉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온 천하가 목숨을 지탱하고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온 천하를 얻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잃지 않는 길을 찾고 그 길을 따르고자 할 것입니다. 진심으로 자기 목숨을 귀하게 여긴다면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생존을 위해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에게 온 천하를 주시고, 온 천하 위에 존재하는 이스라엘을 꿈꾼 것입니다. 그들은 온 천하를 얻는 것에만 몰두 했지 자기 목숨을 잃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베드로처럼 세상의 것을 얻고 누리는 생존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얻었든 그것이 우리 목숨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목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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