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11.08 08:54

(112강) 패역한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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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14-20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7142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4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15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18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19 이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0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설교>

 

믿음만 있으면 못할 것이 없다’는 말을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또는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말에 매료되어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은 생각에 ‘믿습니다’라는 말을 반복하지만 과연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맞는 말일까요?

 

 

현대 교회는 ‘믿음’을 거의 만능으로 선전합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주님을 믿고 기도하면 해결해 주십니다’라고 말하고, 교회 생활에 등한시하면 ‘믿음이 없어서 그렇다’라고 합니다. 삶의 모든 문제를 믿음과 연관하여 믿음만 있으면 만사형통을 이룬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믿음이 중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믿음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능력입니다. 능력이 주어짐으로써 병이 고침 받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즉 믿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주는 능력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믿음이 우리가 원하는 그러한 능력을 발휘하는 힘으로 주어지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 얘기를 하고 계십니다.

 

 

◎ 정말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까? ◎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시자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들을 둔 한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꿇어 엎드립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면서 제자들은 간질병을 고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먼저 책망을 하십니다.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간질병을 고쳐달라고 한 것과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것을 믿음의 문제로 말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는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까?’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의 내용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간질병을 고치지 못한 것을 믿음의 문제로 말씀을 하고 계시고, 패역한 세대 역시 믿음이 없는 것과 연관된 책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해지는 것 같습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귀신도 쫓아낼 수 있는 능력의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20절)는 말씀을 보면 마치 능력의 믿음을 가지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결국 ‘믿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말은 이 말씀 앞에서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도 믿음으로 산에게 명령을 해서 옮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는 아브라함도 그 같은 일은 하지 못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산을 옮기려고 했다가 실패한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브라함이 그 같은 일을 시도했다고 해도 성공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간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라면 믿음이 커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산을 명해서 옮기는 것과 간질병을 고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큰 능력입니까? 말할 필요 없이 산을 명해서 옮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믿음을 겨자씨로 비유합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다는 것을 비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크기, 분량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없는 것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작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산을 명해서 옮기는 믿음이 겨자씨로 비유된다면, 간질병을 고치는 믿음은 무엇으로 비유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귀신을 쫓아내고 간질병을 낫게 하는 믿음은 믿음도 아니라는 의미가 됩니다. 믿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산을 명해서 옮기는 일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 것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의 능력과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과장법을 사용하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산이 스스로 움직여서 이동할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님을 생각한다면 과장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산은 지각변동에 의해서 얼마든지 움직일 수 있고 지구에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것은 세상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행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단지 과장된 말씀은 아닙니다. 즉 산을 명하여 움직이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만 가능한 일이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일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믿음은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산을 명해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여기는 우리는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풀어가야 할 내용입니다.

 

 

◎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

 

 

간질병에 걸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한 사람이나, 자신들은 왜 귀신을 좇아내지 못했는지 물어보는 제자들이나 동일한 것은 예수님을 능력을 행하는 분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질병에 걸린 아들을 둔 아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병이 발작을 하면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니 한시라도 아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을 것이고 하루하루 노심초사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지금은 좋은 약이 있어서 증상을 약화시킬 수도 있겠지만 당시에 간질병은 인간으로서는 손을 쓸 수가 없는 불치병이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았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 예수님은 이미 수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병자를 고치셨다는 소문이 퍼져있을 때이기 때문에 예수님에게만 나아가면 자기 아들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패역한 세대라는 책망을 하십니다.

 

 

이 책망은 아들을 고쳐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포함한 것이고 나아가서,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 세상 자체를 두고 하신 책망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실 영광의 나라에는 전혀 마음을 두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믿음이 없고 패역한 것으로 책망하신 것입니다.

 

 

제자들도 간질병을 고치는 능력에만 호기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왜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는지가 궁금할 뿐이었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그 이유를 찾아서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행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관심을 능력을 행하는 것에 두고 있는 것이야 말로 믿음이 없는 것이고, 패역한 세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 위에서 있었던 영광의 사건을 알지 못한 산 아래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 이루실 영광의 세계를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관심은 온통 믿음의 능력으로만 향할 것입니다. 병이 고침 받고, 어려운 일이 해결되는 믿음에만 관심을 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통해서 믿음의 능력과 그 우월성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또한 그러한 능력을 행하는 것은 신자의 믿음에 달려있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것이 사실이라면 산을 명하여 옮길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산을 옮길 수 없다면 믿음의 능력은 우리가 행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인정 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을 가져서 어떤 능력을 행하고 싶어하는 것이야 말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영광의 나라를 보게 하고 그 나라에 마음을 두고 소망하게 합니다. 그것이 참된 믿음의 역사입니다.

 

 

◎ 무엇이 믿음인가 ◎

 

 

17장은 산 위의 세상과 산 아래의 세상으로 나눠집니다. 예수님은 제자 셋을 산 위로 데려가셔서 예수님이 이루실 영광의 세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세계는 곧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제자들의 시야에서는 사라졌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세계이기에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제자들은 영광의 세계에 속한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소망하고 믿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지만 영광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영광의 세계에 마음을 두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에만 호기심을 둡니다.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능력만을 구하거나 아니면,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믿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 이 세대가 왜 믿음이 없고 패역한가?’라고 한탄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대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세대란 역사적, 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당시의 사람과 같은 본질을 갖고 있는 우리 역시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말에 대해 반발하고 싶은 분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수많은 교회가 세워져 있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채우고 있습니다. 외적으로 본다면 믿음이 왕성한 세대라고 할 수 있기에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는 것은 지금 이 시대와는 맞지 않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이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사람의 생각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면 그것이 곧 믿음의 역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은혜의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이 없고 패역하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아예 믿음이 없는 자로 말씀하신 그 이유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앞서 말한 대로 간질병을 고치지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간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이루어질 생명의 세계, 예수님으로 인해서 신자에게 입혀질 영원한 영광의 세계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싶은 것입니다.

 

 

고전 13:2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는 말을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산을 옮기는 능력의 믿음이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신자의 신자 됨은 능력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증거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병을 고치고, 심지어 설사 산을 옮기는 능력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것이 신자 됨을 증거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 됨은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안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은 예수님이 이루신 생명의 세계에 마음을 두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의 악함을 바라보고 나의 죽음을 절감을 하시며, 예수님이 이루신 생명의 세계에 마음을 두게 합니다. 이 믿음이 믿음으로 인정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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