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11.15 21:10

(113강) 십자가와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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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7:22-23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7222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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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2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설교>


◎ 십자가와 새로운 세계 ◎

 

 

열심이 있다고 해서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열심이라고 해봐야 교회 생활에 대한 부지런과 목사가 신앙의 원리라고 말하는 주일성수와 기도와 십일조 생활이 거의 전부이겠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좋은 신앙으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 눈에 그렇게 비춰질 뿐이고, 그것들이 목사의 마음에 흡족하기 때문에 좋은 신앙으로 강조할 뿐이지 진심으로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십자가를 추구하는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신앙은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생각하고 살아오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고, 그 세계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음을 하는 것입니다. 그 세계는 지금껏 살아온 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무가치한 것보다는 진정한 가치를 품고 있는 세계에 마음을 두는 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사도 바울은 갈 6:14절에서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는 고백을 합니다.

 

 

세상은 육체적인 조건을 자랑의 도구로 삼습니다. 여자들은 육체에 걸치고 있는 옷이나 보석, 또는 명품이라는 것을 자랑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세상이 알아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세상에서의 지위나 성공을 자랑합니다. 그것이 남자의 자존심이고 세상이 부러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식의 잘됨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자식 또한 부모에게는 자기 육체와 연결된 자기 몸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을 붙들고 십자가를 자랑스럽게 얘기하라는 것일까요? 물론 사람들에게 십자가를 얘기할 수 있는 기회가 수시로 주어지기는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진심으로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은 십자가를 삶의 근본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앞서 말한 대로 육체를 자랑의 도구로 삼는다면 삶은 자기 육체의 확대와 치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자랑거리가 될 만한 육체로 만들기 위해 힘쓰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삶의 근본이 자기 육체, 즉 자기 몸을 위한 것이라면 그가 아무리 사람들을 붙들고 십자가를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도가 말한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만 자랑한다’는 그 같은 말을 들으면 왠지 우리 마음이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신자로서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세상이 알아주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로써 십자가를 외치는 사도의 말은 얼마든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삶은 십자가가 아닌 세상 방식 그대로 좇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십자가의 길 ◎

 

 

예수님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는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두 번째입니다. 여러분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전혀 이상하지도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교회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듣는 예수, 즉 구세주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어릴 때부터 듣고 가르침을 받아왔던 메시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영광을 회복시켜 줄 강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로 믿었던 분이 자신의 입으로 죽는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말을 하셨지만 당시 제자들에게 다시 살아난다는 말보다는 죽임을 당한다는 말이 귀에 더 생생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반복해서 죽고 다시 사실 것에 대해 말씀하는 것은 장차 일어날 일에 대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고 다시 사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그 뜻에 순종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가시는 길인데 그것을 인간이 막을 수도 만류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처음으로 죽으심과 부활을 얘기했을 때 그리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뜻을 앞세우는 것이 곧 사람의 일에 매진하는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으심과 다시 사심은 장차 십자가로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을 향해서 다른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고 십자가를 믿는 자는 세상과의 관계도 완전히 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기독교인의 신앙의 표로만 생각할 뿐 십자가가 근본이 된 삶을 살지 못한다면 신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십자가로 인해 달라진 세상과의 관계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는 말로 고백합니다. 이 말은 세상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음을 뜻합니다. 물론 세상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게 되었고 세상의 요구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과 소통하며 살았던 옛사람은 죽고 십자가와 소통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의 새사람으로 거듭난 신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당시에는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고전 1:23절의 말씀대로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는 미련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즉 십자가는 세상에 내어 놓고 자랑할 만한 고상한 원리도 가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구원의 도리들을 보십시오. 하나같이 고상하고 가치 있어 보이는 이론과 삶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는 고상하고 가치 있어 보이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어리석어 보이고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십자가는 오히려 걸림돌입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믿는 것은 인간이 노력해서 완성해 나가야 할 모든 업적과 고상하고 가치 있는 행위적인 것을 내려놓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의 현장인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십자가는 삶의 근본일 수밖에 없으며 이것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는 말로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가셔야 할 길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은 제자들이 꿈꾸고 있는 세상에서의 영광을 누리는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변화산의 사건으로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은 전혀 새로운 영광에 눈을 떠야 했습니다, 그것이 새로운 세계에서 누릴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비록 장차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지만 보이는 그것이 예수님의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으심으로 십자가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수치가 아니라 영광임을 보여줄 것입니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신자입니다.

 

 

◎ 제자들의 근심 ◎

 

 

그런데 제자들은 죽고 다시 사심에 대한 말을 듣고 근심을 합니다. 제자들은 왜 근심을 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신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영광의 세계가 상실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불안하게 하고 불안이 곧 근심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산에서 보여준 참된 영광의 세계에 마음을 두지 않는 사람의 현실입니다.

 

 

우리 역시 삶의 문제로 불안해하고 근심합니다. 직장 문제, 승진 문제 등 현실적인 것으로 불안과 근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노후라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근심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육체의 생계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불안과 근심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보고자 신을 찾으면서 신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에게 자기 열심을 보이고 그 대가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시작된 영광의 세계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 영광에 매어 사는 것이고, 신앙은 이같은 종교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사도의 고백에 우리 함께 동질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처럼 십자가의 세계에 눈을 떴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새로운 세계를 알았을 때 사도의 모든 고백에 심적으로 동의하며 동질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 그럴 때 사도의 기쁨을 전부는 아니겠지만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는 것이고, 사도의 기쁨에 함께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자리가 생기게 되고 그 자리가 점차 확산됨으로써 새로운 세계는 점차 여러분께 현실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기대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먹고 사는 문제에 너무 집착해 있습니다. 자식을 잘 키우고 안정된 삶을 누리면 된다는 생각에 너무 몰두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자연히 십자가의 세계나 참된 영광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합니다. 현실의 문제와 별 상관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세상에서의 자기 문제 때문에 불안해하고 근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불안과 근심이 있을 때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고 소리 지르면서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하기보다는 왜 불안과 근심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로 이루어질 다른 세계에 대해 말씀을 하는데, 제자들은 여전히 자기 세계에 몰두함으로써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의 영광의 세계가 아닌 세상에서의 영광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임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근심하지 않게 도와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십자가의 영광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근심하게 합니까? 우리를 근심하게 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그 어느 것 하나도 우리를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즉 우리는 전혀 가치 없는 일로 근심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십자가로 인한 영광의 세계의 가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광의 세계의 가치를 아는 것, 그보다 복되고 좋은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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