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12.05 18:18

(115강) 천국과 어린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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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1-7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8010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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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으니라

7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설교>

 

◉ 제자들의 관심 ◉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씀으로 가르치셨지만 제자들을 가장 당황스럽게 한 말씀이라면 아마 사람들에게 붙잡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십자가 사건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갖고 있던 메시아 상은 승리자로 오신 메시아인데, 십자가 사건은 패배자로 끝나는 메시아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 제자들은 세상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는 문제에 관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십자가는 당시 죄인을 사형시키는 방법 중에 하나로써 가장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국가를 전복하려고 한 죄인이나 흉악범을 이 방법으로 사형 시켰고, 따라서 십자가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가장 낮은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 가셔서 예수님이 일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고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낮은 자리로 내려감을 뜻합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혀 모름으로 인해서 십자가 사건을 앞두고 있는 긴박하고 위기의 상황에서 자신들의 거취 문제에 대한 관심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붙들려 죽으신다는 말씀을 두 번이나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문제에 마음을 두고 예수께 묻는 것이 참으로 철없이 보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갑자기 ‘천국에서 누가 크니이까’라고 묻는 것은 아마 예수님이 자신들을 차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 산으로 가신 적이 있고, 특히 베드로에게는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는 엄청난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성전 세를 내는 문제에서는 물고기를 낚아서 얻은 한 세겔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성전 세를 내도록 하신 일이 있습니다.

 

 

 성전 세를 낸다면 다른 제자들도 예외일 수는 없는데 유독 베드로의 것만을 챙기시고 계시는 이런 일들이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베드로만을 높이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누가 큰지에 대한 질문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천국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 ◉

 

 

제자들의 질문은 천국을 높고 낮음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제자들의 천국관에 문제가 있으며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천국이 어떻게 주어지는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유대인들이 갖고 있는 전통적 생각 그대로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 백성이고, 율법을 지켜온 신앙 때문에 당연히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율법을 지키는 노력을 해왔기에 천국은 당연히 자신들의 몫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 4:36-38절에 보면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 보면 거두는 사람은 자신이 노력한 것을 거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생은 우리의 노력의 대가로 거두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즉 예수님의 노력에 참여한 것일 뿐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천국은 인간의 노력의 열매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고 천국에 참여한 자가 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고 부활하시는 노력을 하셨고, 우린 다만 예수님의 노력으로 맺어진 열매를 아무 노력도 없이 추수하는 입장에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는 문제가 발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질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혀 알지 못할 때 어떤 사고방식이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의 상급에도 차등이 있다고 여기는 것도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상급의 차등을 주장하는 것도 신앙생활을 자신의 노력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력의 여하에 따라 각기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상급의 차등을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십자가의 정신에서 벗어난 사탄의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신자가 신앙으로 살기 위해 노력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예수님이 가신 길에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은 인간의 노력의 여부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즉 믿음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것은 다만 은혜일뿐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어떻게 살든 그 모든 것은 자신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신 은혜의 결과일 뿐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자신의 높고 낮음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국에는 들어갈 수도 없는 불의한 자를 천국 백성이 되게 하신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질문은 참으로 어리석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어리석은 생각으로 사는 것이 또한 우리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십자가를 잘 아는 것 같고 믿음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겠지만 사실 우리는 항상 십자가는 잊은 채 어리석은 길로만 가게 되는 연약한 자들일 뿐입니다.

 

 

◉ 어린아이의 의미 ◉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한 어린아이를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3,4절)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자를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으로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바꾸어 말하면 천국에서 큰 자가 되려면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 위한 방법으로 이용됩니다.

 

 

큰 자가 되기 위해 자신을 낮춘다면 그것은 진정한 겸손이 아닙니다. 진정한 겸손에는 그 어떤 의도도 담겨 있지 않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아린아이들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릅니다. 자신을 높이는 것 또한 모릅니다. 무엇이 교만이고 무엇이 겸손인가를 모른 채 행동합니다.

 

 

어린아이는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회적 구조 속에서도 어린아이들은 자신들이 낮은 자리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즉 어른은 큰 자고 어린 자신들은 낮은 자라는 기준이 없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른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지켜줄 대상일 뿐입니다. 어른을 보면서 ‘누가 더 큰가’라는 경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높고 낮음의 사고방식은 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동일한 위치에 있습니다. 이것을 잊는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를 말하면서도 이것을 잊습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모든 인간이 죄인일 뿐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소홀히 하기 때문에 자기 신앙생활, 자기 노력에 대한 평가를 하려고 하고, 그것으로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은 우리의 노력과는 무관합니다. 노력을 하려고 할 수는 있으되 신자가 결국 깨닫는 것은 자신의 노력과 믿음은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영생, 천국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주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믿음으로 살려고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 죄에 끌려가면서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될 뿐입니다.

 

 

시기와 경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보면서 그 어떤 노력으로도 죄를 이길 수 없다는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 절망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피를 보게 될 때 비로소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가 왜 긍휼과 자비이며 보배로운 것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는 높고 낮음, 크고 작음을 의식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천국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개인이 천국에 들어가고 들어가지 못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이 결단코 용납하지 않는 것을 무엇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높고 낮음의 사고방식입니다.

 

 

◉ 십자가의 세계는 ◉

 

 

참으로 어려운 사실은 우리에게는 높고 낮음의 자리가 너무나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도 높고 낮음의 정신으로 바라봅니다. 학생들이 공부하기 싫지만 할 수 없이 공부할 수밖에 없는 것도 낮은 자리가 아닌 높은 자리에 서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기독교인들이 큰 교회에 관심을 두는 것도 결국 큰 교회 되는 것이 높은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라는 생각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작은 것은 정당화하는 말이 아닙니다. 외형적으로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크고 작음이 십자가의 세계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에 보면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높고 낮음의 사고방식이 없을 때 가능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높고 낮음의 사고방식을 버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권능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의 세계에는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 믿음을 높고 낮음과 연관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를 믿는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뜨려지는 것이 나을 정도로 엄청난 악에 해당되는 것임을 말씀합니다.

 

 

세상은 사람을 다르다고 봅니다. 학식과, 재산과, 지위와, 인격과, 행함에 따라 사람을 구분합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부자와 나사로를 같은 사람으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높고 낮음이 분명히 구분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천국과 상관이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건지시고 십자가의 세계를 맛보게 하심으로써 전혀 새로운 사고방식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그것이 바로 높고 낮음의 구분이 없는 새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새사람은 절대 우리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이것을 실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가 어떤 의미의 말인가를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만 높이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접할수록, 그 은혜가 우리에게 가득할수록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높고 낮음을 따질 수 없는 존재임을 발견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십자가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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