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12.19 18:48

(117강) 교회와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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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15-20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8152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설교>

 

◎ 인간관계에서 드러나는 것 ◎

 

사람이 모였을 때 필히 드러나게 되는 것은 죄입니다. 두 사람이든 백 사람이든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하게 되면 인간의 본질인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자신의 존재 가치에 눈을 뜬 인간으로 바뀌었습니다. 타인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가 되어 더 나은 인간으로 높은 위치에 도달하려는 욕망이 인간이 본질로 자리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간은 항상 타인과 경쟁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타인이 자신보다 더 가치 있는 존재로 평가 받게 되면 시기와 함께 분노가 있게 됩니다. ‘내가 너보다 못한 게 뭐가 있는데’라며 상대방과 자신을 평가하면서 스스로를 높은 위치에 두려고 하기도 합니다.

 

 

이런 인간성은 세상에서 물적 가치가 있는 것을 소유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차별성을 부각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자신을 치장하고 소위 명품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사람이 그 어떤 인간관계도 맺지 않고 홀로 생활한다면 어떨까요? 일단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고, 타인으로부터 존재 가치를 인정받아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무엇보다 외적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또한 타인과의 경쟁도 불필요할 것이고, 타인으로 인한 시기나 분노와도 무관해 질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질문을 했던 것도 제자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기 때문에 발생되는 문제였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가 단 한명이었다면 그러한 질문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홀로 생활한다고 해서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기 존재 가치를 의식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어느 순간 인간관계에 뛰어 들게 되면 자기 존재 가치에 대한 관심이 욕망으로 자리하면서 경쟁과 시기와 분노가 여지없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의 실존으로 자리하고 있는 죄의 문제를 확인하면서 자신의 본질에 대해 답을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아닌 세상에도 인간관계는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죄의 실존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기 존재 가치에 관심을 두고 자신의 가치를 격상시키기 위해 사는 것을 ‘자기 개발’이라고 하면서 사회생활을 위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자기 개발을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자기 개발이 자신을 타인보다 더 뛰어난 존재로 만들어서 차별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그러한 인간성으로 인해 항상 ‘누가 크냐’라는 경쟁 속에서 작은 자와 큰 자라는 차별이 있게 되고, 그러한 차별은 결국 작은 자를 무시하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그러한 인간관계의 구조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인간의 모임이기 때문에 인간 가치를 둘러 싼 차별적 평가와 시선이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다른 점은 교회에서의 인간관계가 단지 인간만의 관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관계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의 관계로 이루어진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세상과 다른 인간관계로 나타나야 합니다.

 

◎ 교회에도 죄는 있다 ◎

 

‘천국에서 누가 크냐?’라는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서 작은 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신 예수님께서 이어서 죄의 문제를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죄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고 싶은 마음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크게 심각한 문제로 여기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죄는 신자에게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원적인 문제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양심적이고 윤리적으로 산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교회라고 해서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온전한 인간이 아닙니다. 죄를 실존으로 하고 있는 부패한 존재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 아래 믿음이라는 명목이라고 모인다고 해도 인간관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죄는 당연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경쟁, 시기, 차별, 분노, 미움, 이 모든 것이 교회 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라는 말씀이 그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작은 자에 대한 말씀과 연결시켜 보면, 비록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작은 자를 무시하는 것이 악한 것이고, 또 왜 작은 자를 무시할 수 없는 지에 대해 들었다고 해도 우리에게는 여전히 큰 자 작은 자에 대한 차별의식이 존재하고 그로 인해서 작은 자를 무시하는 죄를 범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말씀한 죄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항상 죄를 범하고 살아간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떤 죄냐는 것은 무의미한 물음일 뿐입니다.

 

 

또한 형제가 죄를 범한 것이 나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타인에게 죄를 범하는 것을 목격한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공동번역이나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나에게 죄를 범한 것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이 또한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나에게 죄를 범한 것이든 제 삼자에게 죄를 범한 것이든 중요한 것은 ‘교회에 죄가 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 죄에 대해 권고할 때 인간의 반응은 ◎

 

형제가 죄를 범했을 때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먼저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고 합니다. 즉 일대 일로 만나서 죄에 대해 권고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 권고를 받아들이면 형제를 얻은 것과 같지만, 받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신 19:15절에 있는 율법에 의한 방식입니다. 그래도 해결이 안되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는 것이 죄를 범한 자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한 이 방식대로만 하면 교회에서의 죄 문제는 해결될까요? 죄를 범한 자가 있을 때 그 죄에 대해 권고하면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면서 그 충고를 받아들일까요?

 

 

인간에게 있어서 죄 문제는 그의 존재 가치의 하락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여러분의 죄에 대해 충고할 때 인정하면서 회개할 것 같습니까?

 

 

그러면 만약 죄에 대한 권고를 듣지 않아서 두 세 사람의 증인을 대동한다면 확고하게 드러난 죄에 대해 인정할까요? 아마 자신을 몰아붙인다는 생각이 앞서면서 더 크게 반발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교회에 말을 해서 온 교회가 자신의 죄에 대해 권고한다면 어떨까요? 사실 예수님이 말씀한 방식으로는 자기 보호본능으로 뭉친 인간성을 자극하는 것일 뿐 죄에 대한 해결책으로는 효과적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고 합니다. 이것을 많은 사람은 교회에서 출교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교회가 죄에 대해 권고를 해도 받지 않고 고치지 않으면 출교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삼기도 합니다. 하지만 죄를 그런 식으로 해결한다면 교회에 남아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 ◎

 

먼저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씀이 교회에서 출교하라는 의미인지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에서 나타난 이방인과 세리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에서 이방인과 세리는 죄인의 자리에서 예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을 구하는 역할로 등장합니다. 유대인은 율법에 대한 실천이 의가 되어서 살아가지만, 이방인과 세리는 죄인으로써 예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이 아니면 안되는 존재로 부각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라는 말씀은 교회에서 출교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불쌍히 여겨주심과 용서가 아니면 안되는 존재로 여기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권고나 충고를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 회개하기보다는 자기 방어적인 행동으로 일관합니다. 타인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것을 자기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문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의 중심에는 바로 저와 여러분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로만 죄가 해결되는 불쌍하고 연약한 존재가 바로 여러분 자신임을 주지하고 그러한 마음으로 형제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1절부터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 교회됨의 근거는 ◎

 

그러면 18절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인간이 죄를 범한 후 땅과 하늘은 단절된 관계에 있습니다. 따라서 땅은 죄로 인한 사망으로 가득할 뿐 하늘의 생명과는 상관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화목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땅은 하늘과 통하게 된 것이고, 그 길이 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것을 19절에서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땅에서 구하면 하늘에서 이루시는 이것이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말씀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이 관계 안에서 모이는 것이고 그것을 교회라고 일컫습니다.

 

 

두 사람이 합심하여 구한다는 것은, 두 사람이 함께 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실감하고, 따라서 예수님의 용서만이 나를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에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을 구하게 되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반드시 그 기도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고 그것이 곧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 교회에 주께서 함께 하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용서를 근거로 하는 모임입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길 때 용서가 가능합니다. 아니 서로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는 것이 곧 서로를 용서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가 합심하여 기도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서로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기면서 예수님의 용서가 아니면 안되는 불쌍한 존재로 여기면서 주의 용서로 기뻐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고 예수님은 반드시 그들 중에 함께 하십니다. 이 교회가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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