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1.02 20:52

(119강) 불쌍히 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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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8:23-35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82335.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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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설교>

◉ 교회와 용서 ◉

 

 

기독교의 본질을 용서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지만 사실 용서를 기독교만이 점유하고 있는 독특한 사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알다시피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나 성현으로 일컫는 여러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용서를 인간이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보이신 용서가 세상이 말하는 용서와 단어는 같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면 기독교의 용서는 세상이 흉내 낼 수 없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이 독특성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에게만 있는 용서라는 독특한 세계로 들어가 보고자 합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용서로 말미암아 발생합니다. 예수님의 용서가 마음에 있고, 용서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한다면 그것이 곧 교회이고, 용서는 잊고 다른 것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크고 훌륭하고 화려한 건물에서 몇 명이 모이든 교회는 이미 사라지고 없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무리 교회라고 고집을 해도 예수님께서 인정을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20절)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죄가 드러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모이면서 서로를 통해 자신의 악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용서의 대상으로 보게 되면서 예수님의 용서 안에서 살고자 하게 됩니다. 이들이 모이는 그곳에 용서의 주님이 함께 하시고 그것을 교회라고 일컫는 것이지 단지 사람이 모여서 예배라는 의식을 행하기 때문에 주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예수님의 용서 안에 있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거될까요? 그것이 바로 형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용서를 인간이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이라고 합니다. 물론 사회적 분위기와 인간의 공감 안에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악한 자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악인까지도 용서를 한다면 세상은 그 용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할 것이고, 용서한 사람은 그에 따라 그 가치가 상승되게 됩니다. 그리고 용서 받은 사람은 용서한 사람에게 자연히 종속되는 관계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용서의 개념입니다.

 

 

◉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

 

 

그러면 하나님의 용서와 세상의 용서에는 어떤 차별적인 요소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용서를 말씀하기 위해서 종들과 결산을 하는 임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천국 이야기라고 말씀하시고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임금을 통해서 천국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막연하게 ‘교회 다녔으니 죽으면 천국 가겠지’라는 생각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천국은 그렇게 쉬운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천국 갈 자와 가지 못할 자를 구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에 마음을 두어야 하고 과연 나는 그 기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천국을 바라보신다면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등장합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1데나리온이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액수임을 생각해 보면 1달란트는 노동자의 16년의 품삯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1만 달란트는 노동자가 16만년 동안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액수고, 지금의 가치로 따진다면 노동자 하루 품삯을 5만원으로 계산해도 3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됩니다. 종은 주인에게 그토록 어마어마한 액수를 아무런 조건없이 탕감 받습니다. 오직 주인의 불쌍히 여겨주는 그 마음에 의해서 탕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탕감 받은 종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납니다. 백 데나리온은 500만 원 정도의 액수입니다. 종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동료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 즉 3조원과 5백만 원은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액수입니다. 물론 3조원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5백만 원도 일반 노동자에게는 큰돈입니다. 하지만 3조원 앞에서 5백만 원은 말 그대로 조족지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일반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꿈도 꿀 수 없는 일만 달란트와 오백 데나리온을 비교하여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짊어지고 있는 죄와 인간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죄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가를 실감하게 하십니다.

 

 

◉ 용서의 은혜와 그 가치 ◉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이 지고 있는 죄의 무게를 전혀 실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무게를 실감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서는 형제 용서 또한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천국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내용입니다.

 

 

35절에 보면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문자대로 해석하면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용서보다 인간의 용서를 앞세우는 것이 됩니다. 인간의 용서에 의해서 하나님의 용서가 결정된다는 의미의 해석이기 때문에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일단 하나님께서 용서를 하셨지만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 용서가 취소된다는 의미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끝까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안에 머물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 용서를 실천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종이 주인의 불쌍히 여김으로 인해서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면 주인이 불쌍히 여겨준 그 은혜의 가치는 일만 달란트에 해당됩니다. 16만년을 일을 해도 갚을 수 없는 엄청난 가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종은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옥에 가둠으로써 일만 달란트 가치의 은혜를 멸시해 버립니다. 이것은 자신을 불쌍히 여겨준 주인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뜻이고, 그것이 곧 천국에 해당되지 않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종이 불쌍히 여겨주신 주인의 은혜의 가치를 알고, 그 은혜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자신을 불쌍히 여긴 주인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 데나리온을 아까워하지 않고 탕감해 주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신 주인의 은혜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준 자신의 행동 또한 일만달란트를 탕감해준 주인의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의롭게 여기지 않고 자랑하지도 않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용서 안에서 용서의 은혜를 아는 신자에게서 나타나고 증거되는 용서의 기적입니다. 이것이 천국에 해당되는 신자입니다.

 

 

종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해야 하는 근거는 주인의 불쌍히 여겨주심에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다면 누가 봐도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탕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줄 수 있는 힘과 능력은 종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불쌍히 여겨준 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때문에 종의 용서는 주인의 용서의 은혜 안에서 가능한 것이고 종의 용서로 말미암아 주인의 용서가 높임 받고 증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신 용서의 은혜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며 우리가 생각한다고 해서 실감되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죄의 무게와 깊이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무겁게 다가올수록 상대적으로 나 같은 자를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크고 넘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 용서의 은혜가 왕 노릇하는 신자 ◉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 5:20,21절에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는 말을 합니다.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옥에 가둔 것을 본 다른 동료들이 그것을 딱하게 여깁니다. 종의 행동이 너무 심하고 부당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주인의 용서 안에서 종의 행동은 분명 부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우리는 불쌍히 여겨주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 안에 있습니다. 용서의 은혜 안에서는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불쌍히 여기지 못하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당한 것을 전혀 부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종처럼 자신에게 빚진 자의 멱살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을 때 종은 무척 기뻤을 것입니다. 평생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빚으로부터 자유를 느꼈을 것입니다. 주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 자유, 감사를 자신에게 빚진 자를 만난 순간 잃어버립니다. 빚진 자를 만난 순간 백 데나리온을 생각 했을 것이고, 백 데나리온을 아까워하는 마음이 주인의 용서로 인한 기쁨과 감사를 잊게 한 것입니다. 종의 이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들의 현주소가 아니겠습니까?

 

 

용서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종도 주인의 용서를 아느냐고 물어보면 안다고 할 것입니다. 주인의 용서에 감사하느냐고 물어보면 감사한다고 할 것입니다. 주인의 용서가 크다는 것을 아느냐고 하면 역시 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용서의 은혜가 왕노릇하는 것이고 그것은 용서하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용서의 은혜가 왕노릇하는 그가 진심으로 용서 받음을 아는 신자이고, 그에게서는 용서라는 기적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천국 백성인 것입니다.

 

 

‘나는 용서 받았다’는 것으로 멈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용서를 아는 것으로 다된 것처럼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수시로 용서의 은혜를 잊고 삽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이웃에게, 형제에게 어떻게 하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것을 보면 분명 용서를 아는 신자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용서의 가치를 멸시하는 종의 모습만 드러낼 뿐입니다. 사소한 실수조차도 받아주고 용납하지 못하고 같이 공격하고 마음에 담아두는 것으로 반응하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신 은혜를 잊은 것이고,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을 가지고 우리의 불의함을 지적하시면서 하나님의 용서의 가치를 알게 하시고 십자가의 은혜가 부각되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천국은 주인의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 받은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이 은혜는 용서 받은 신자가 형제를 용서함으로써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의 은혜가 왕노릇하는 것으로 한해가 시작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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