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7.26 09:38

(97강) 예수와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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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4:22-33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4223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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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2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설교>

 

◎ 신앙이 무기력하다고 생각된다면 ◎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은 인간의 경험과 상식과 자연적 질서와 법칙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말 한마디로 소경이 눈을 뜨고 문둥병자가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고 수십 년 된 병자가 낫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아납니다. 그리고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 명이었던 무리를 배불리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습니다. 또한 오늘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런 성경 기사를 예수님의 신성을 고취하기 위해 후대 사람들이 지어낸 신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병자가 고침을 받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오병이어 사건이나 물위를 걸은 일은 자연적 질서와 상식을 벗어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경험과 상식, 그리고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의 자연적 질서 안에서 성경을 이해하려고 하게 되면 결국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신 일이 보여주는 새로운 세계는 볼 수 없게 됩니다. 자기의 경험과 상식에 일치된 세계에 갇혀서 그 세계를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 믿음의 목적이기에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습니다.

 

 

때문에 매사를 자기 양심에 따라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면서 교회 생활에 적당히 열심을 내면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인 일뿐 신앙인은 아닙니다. 천국은 이러한 종교인은 철저히 거부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자기 세계가 있습니다. 신앙의 문제도 자신이 원하고 기대하는 대로 되어졌으면 하는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신앙이 자신에게 복과, 심리적인 안정과 평안과 기쁨을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대가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교회를 이용해서 다른 이득을 노리는 사람이겠지요.

 

 

그런데 신앙을 통해서 기대했던 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 정말 아무것도 얻어지는 것이 없다고 여겨질 때 사람은 무기력함을 느낍니다. ‘이대로 신앙생활을 계속 해야 하는가?’회의감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오랜 세월 교회를 출입하며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왔고, 그 이름이 머리에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불신앙에 대해 불안감이 작용 합니다. 그래서 차마 신앙을 버리지는 못하지만 대신 무의미한 교회생활만 유지될 뿐입니다.

 

 

많은 교회가 수많은 행사를 동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의 무기력함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일환인 것입니다. 수많은 행사를 통해서 자신이 뭔가 하고 있다는 보람을 갖게 하고 그것으로 심리적인 안정과 기쁨을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스스로 자신의 신앙이 너무 무기력하다는 생각을 하시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신앙이 무기력하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저는 그 이유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를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 일하시는 그 세계를 보지 못하고 자기 세계만을 바라보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체험되지 못한 현실에서 무기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예수님을 유령으로 ◎

 

베드로가 물 위를 걷습니다. 사람은 물위를 걸을 수 없는 것이 정상인데 물 위를 걸었다는 것은 자연 질서와 법칙을 뛰어 넘은 기적의 사건입니다. 만약 여러분께 이런 기적의 체험이 주어진다면 어떻겠습니까? 놀라운 체험으로 인해 신앙의 무기력은 당장 해소되고 온 세상의 놀라운 반응을 접하면서 일약 스타로 떠오를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얼마나 오래갈까요? 물 위를 걷는 것도 계속 보면 식상해집니다. 결국 세상의 반응도 시들해질 때가 있을 것이고, 자신도 물 위를 걷는 것이 처음처럼 신기하지도 재미있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체험이 주어지지 않는 한 또 다시 신앙의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체험이란 이런 것입니다. 그 어떤 놀라운 체험을 했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 쾌감을 누리게 해주는 마약과 같은 것일 뿐, 체험이 신자로 하여금 평생 주 만 바라보게 하는 능력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다에서 큰 파도를 만나게 되고 물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마태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서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신 얘기를 함으로써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바다에서 큰 파도를 만나 고난을 당한 시각은 밤 사경입니다. 밤 사경은 새벽 1-3시 사이라고 합니다. 어둠이 깊을 시각이기 때문에 바다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이다’라고 소리칩니다. 인간은 물 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고 사실이며 법칙이기 때문에 물 위를 걸어오는 사람을 보면서 ‘저것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령이다’라고 소리친 것은 그들로서는 극히 당연한 반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파도를 만나게 하신 후에 파도를 헤치며 물을 걸어 제자들에게 가심으로써 유령 소동을 일으키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함일까요? 능력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면 지금까지 행하신 능력만으로도 충분할 것이고,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능력을 발휘에서 자신을 구원하셨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들의 손에 의해 연약하게 돌아가심으로써 예수님이 행하신 모든 일이 물리적인 능력과는 상관이 없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파도를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을 도와주기 위해 오신 것일까요? 물론 결과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기 때문에 외형적으로는 고생하는 제자들을 돕기 위해 오신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제자들을 돕기 위한 것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도록 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아예 바람이 불지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자들의 믿음을 연단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러한 것은 성경을 단편적으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이 본 것은 유령이 아니라 예수님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걸어오신 것을 유령이 다가오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이것이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이는 환경에서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을 알지 못한 그들의 잘못된 시각이고, 마태는 이것으로 당시 유대인들의 잘못된 시각이 무엇이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예수님이 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 때문입니다. 말씀은 지혜가 있지만 예수님과 같은 위치의 사람에게서는 그런 말씀 또한 나올 수가 없다고 하면서 배척합니다.

 

 

오병이어 기적에서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있는 오병이어가 무리들을 먹이기에는 불가능한 힘없는 것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떼어주신 떡은 무리를 먹이고도 남았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힘없고 무기력한 것이 결코 힘없고 무기력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 새로운 세계입니다. 이 세계를 아는 것이 곧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고 체험되는 기적적인 것을 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비록 복음이라고 해도 보이는 증거가 없고 체험되지 못하는 것은 힘없고 무기력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잘못된 시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 안에 드러나 있는 예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세계는 무기력하지도 힘이 없지도 않습니다. 다만 복음의 힘과 능력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잘못됨으로 인해서 복음의 참된 세계를 누리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이 문제일 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은 오라고 하시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 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함으로 물에 빠지게 됩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것은 베드로에게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이 아니라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이 능력이 되어 베드로를 물에 빠지지 않도록 한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베드로는 다만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만 의지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바람을 바라봤고,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바람을 자신을 위협하는 더 큰 힘으로 인식한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세계, 즉 말씀의 권능과 힘을 의지하지 않은 것이기에 물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가 말하고 싶은 유대인의 실상이고 오늘 우리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에게 물을 걸을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고, 베드로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믿었던 것이라면 바람을 보고도 무서워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으로 인한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의 시각이었습니다.

 

◎ 예수님의 세계를 믿으라 ◎

 

신앙은 예수님의 세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세계가 인간의 눈에는 참으로 무기력하고 힘없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마치 남자만 오천 명이 되는 상황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안되고 문제 해결의 힘도 안되는 하찮고 무기력한 것으로 여기는 제자들과 같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믿음이 작은 자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감이 아닙니다. ‘난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지 자신감으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물을 걸었던 것이 자신감이었습니까? 자신감도 능력도 아니었습니다. 물을 걸을 때 베드로는 기존의 베드로 그대로였습니다. 그런 그가 물 위를 걸은 것은 말씀한 대로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세계에 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계고, 이 세계에서 신자가 할 것은 말씀으로 일하시는 예수님이 함께 한다는 믿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어떤 신기한 체험이 있다면 그것이 자신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감은 곧 믿음의 힘으로 착각하게 하고, 그것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을 가진 자신을 보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이러한 자신감이었습니다. 율법을 실천하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에서 주어지는 자신감이 그들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신앙을 힘없고 무기력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 신앙이었고 문제를 해결하는 도움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볼 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출신 자체가 그들이 의지할만한 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신자들이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편해지고, 기쁨이 생기고, 은혜를 받고, 힘과 자신감이 생기게 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기대하고 생각한 것처럼 안되기 때문에 무기력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인해서 마음이 편해질 수도 있고, 기뻐하게 되고 힘을 얻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전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두고 있던 모든 신앙의 근거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세계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라 하신 그 말씀이 베드로로 하여금 물 위를 걷게 하고, 일어나 걸으라고 하신 말씀이 병자를 걷게 한 것처럼, 예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계입니다.

 

 

바람이 부는 환경은 우리에게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예수님 되심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서 유령으로 착각하는 일들이 허다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람 속에서 나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나를 해치고 두렵게 하는 일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의 세계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이 생명의 능력이 되어 우리를 붙들어 물 위를 걷게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자신감을 가져야 할 문제가 아니라 말씀이 일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신앙에 힘이 없고 기쁨이 없고 자신감이 없다’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데서 스스로 느끼는 자기만의 느낌일 뿐입니다. 신앙을 이런 느낌에 의존하려고 하기 때문에 바람가운데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유령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세계를 생각하시고, 그 세계에 마음을 두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이 힘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고 신앙이 결코 무기력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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