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2.16 11:22

(76강) 무거운 짐 가벼운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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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28-30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12830.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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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 11:28-30  개정)


<설교>

 

진리의 걸림돌

 

유대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못한 것은 예수님에게 메시아로 인정할만한 행위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예수님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여 보게 하셨고, 못 걷는 사람은 곧게 하셨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일들은 메시아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에게는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습니다. 메시아는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기 때문에 죄인이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돕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율법과 규례를 잘 지켜온 자신들을 돕는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으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도무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배척해 버리고 자신들이 생각한 메시아가 오기를 계속 기다린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진리로 오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인간에게 있는 고정관념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인간의 고정관념이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볼 수 없도록 하는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것이지 인간의 소원을 성취해 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는 이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성경을 통해서 우리 앞에 나타나시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유대인들처럼 자신의 기대와 열망에 맞는 다른 메시아를 만들어 내면서 거기에 시선을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배척하고 십자가에 죽인 것도 따지고 보면 그들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입장이라고 해도 별 볼일 나사렛 목수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도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단지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것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의 상식에 의하면 예수는 메시아 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내 상식에 맞는 예수를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상식을 벗어나서 내게 다가오시고 일하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게 되고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상식과 고정관념 밖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되시고, 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의심 없이 믿는 그 사람이야 말로 신앙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

 

본문의 말씀도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상식과 고정관념으로 접근하게 되면 예수님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신자에게 오셔서 그 모든 짐을 내려놓게 하시고 편히 쉬게 해주는 분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본문을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이고 이해일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구절은 교회의 전도지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골 문구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온갖 생활고와 인생살이에 시달린 사람들을 초청하시며, 그분께 나아옴으로서 그 모든 수고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식으로 가르쳐지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자신의 고생과 수고를 쉬게 하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통해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게 될까요? 그들은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무거운 짐, 즉 자신을 고생과 수고로 몰아가는 환경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예수님의 일로 여길 것이고, 그러한 일이 자신에게 주어지고 말 그대로 편안한 환경이 되어야 예수님이 자신에게 함께 하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원하는 편안함은 주어지지 않고 고생과 수고가 계속되기에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가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을 말하면서도 믿음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고, 예수로 인해 실족하는 경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온갖 인생살이에 시달리고 생활고의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가 그런 의미의 말씀이라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은 인간이 지고 있는 인생의 고달프고 무거운 모든 짐을 내려놓게 하시겠다는 의미가 됩니다. 따라서 이 말씀대로 되어지기 위해서는 환경을 개선해 주신다거나 아니면 무거운 짐을 짐으로 느끼지 않을 마음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환경에서도 마음의 쉼을 얻지 못합니다. 아무리 환경이 물질적으로 풍요하다고 해도 인간은 스스로 짐을 만들어 짊어지는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환경 개선이 쉼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생의 짐을 짐으로 느끼지 않을 마음도 인간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욕망의 존재이기 때문에 욕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짐을 짐으로 느끼지 않는 마음 또한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이 말씀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에 해당합니까? 28,29절을 보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짐 진 자들에게 내게로 오라고 말씀합니다. 단순히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께 나오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시니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운다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 것이고, 그로 인해 마음의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원인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가르침 때문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 다른 가르침이란 25절에서 말하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의 가르침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자신의 지혜와 슬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인 율법을 배우고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야 말로 지혜롭고 슬기 있게 사는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들은 오로지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나아간다고 해서 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짊어지는 멍에가 있고 짐이 있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그 짐은 가볍다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은 율법을 100가지를 지키라고 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한 가지만 지키면 된다고 하시기 때문에 가볍다는 뜻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의를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 아래 구원을 받으려면 행위가 선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생각은 자연히 상선벌악의 원리로 나아가게 되고 선행보다 죄가 많을 경우 구원에서 점점 멀어진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반대로 죄를 범한 것보다 선행이 더 많을 경우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보상이 크다고 여기는 잘못된 신앙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항상 구원 받은 자에 합당한 행위가 있어야 했고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개인의 행위는 그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가령 길거리에서 청소를 하는 사람은 청소라는 행위에 대한 세상의 시각만큼 그의 존재 가치가 평가됩니다. 세상이 청소를 천한 일로 여긴다면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자연히 천한 존재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찾아가 돕는 것을 착하고 귀한 행위로 여긴다면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착하고 귀한 사람으로 평가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착하다는 평가와 함께 타인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행위가 필수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즉 착한 행위가 없이 ‘나는 착하다’고 아무리 외친들 세상은 인정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신자다움이라는 것도 세상이 인정하고 칭찬하는 행위로 증명된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행위를 만들어 내기 위해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이 짊어진 짐입니다.

 

 

 

쉬운 멍에 가벼운 짐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한 쉼은 무엇이며, 예수님의 멍에는 무엇이고 예수님께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가 쉼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참된 구원의 방식을 아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 길이 없습니다. 아들을 구원의 길로 보내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자신들이 생각하는 구원의 방식과 길을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이 참된 구원의 길로 오셨음을 안다면 자연히 율법은 구원의 길이 되지 못함을 알 것입니다. 또한 아들을 참된 구원의 길로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이 백성들에게 구원의 의가 될 만한 행위를 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란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율법을 주셔서 율법에 맞는 행위를 의의 조건으로 요구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교인들에게 성경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고 행위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오셨는가에 마음을 두지 않고,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에게 실천과 행위를 요구하면서 그것이 마치 예수님의 요구이며 신자다운 모습인 것처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교인들에게 무거운 짐이 된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자신의 배와 욕망을 위해 이용할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30절에서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와서 배우면 쉼을 얻는다고 했는데, 멍에가 있고 짐이 있다고 하시는 말씀이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멍에와 짐을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신자에게 십자가는 교회가 요구하는 실천 몇 가지를 하는 것보다 더 무겁고 힘든 멍에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다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신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신 것으로 나타났고, 그 순종은 십자가로 온전히 증거되었습니다. 즉 예수님께 배울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온전한 순종이 하나님께 의가 되고, 그 의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고 용서하심으로써 구원에 이르는 방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실천과 행함은 우리를 의롭게 하는데 있어서 전혀 쓸모없음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는 이것이야 말로 짐을 벗고 마음의 쉼에 이르는 길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무슨 멍에가 있고 짐이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사고방식과 구원의 방식에서 나와야 하는 멍에고 짐입니다. 즉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원의 길이 되셨다는 사실을 믿고, 이 믿음위에서 참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이것이 유대교의 율법적 가르침 아래 있던 사람들에게는 기존의 것을 버리고 새로운 가르침 아래 있어야 할 것이 요구된다는 측면에서 이것을 예수님이 지워 주시는 멍에와 짐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멍에와 짐이 가벼울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신자로 하여금 참된 것과 참되지 못한 것을 분별하게 하고, 자연히 참된 것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믿음 아래 있다면, 행위로 인간의 존재 가치를 평가하는 시각에서는 벗어나야 합니다. 행위가 인간의 존재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되지 못함을 아는 것이 곧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운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행위로써 자신의 신자 됨을 타인에게 보여주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무거운 짐으로 지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남보다 좀 더 낫고 다른 행위가 있어야 하고, 실천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붙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는 믿음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미 신자 되었음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실천이 여러분을 신자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우신 피가 여러분을 이미 온전한 신자로 하나님 앞에 세웠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행함과 실천은 예수님의 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고 기뻐하며, 자기 행위에 매이지 않고 예수님의 용서에 매인바 되어서 용서를 나타내고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신자 아니다.’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용서는 율법이 되고 맙니다. 이것은 또 다시 짐을 지는 것입니다. 용서는 예수님에게 배움으로써 자연히 나타나는 열매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예수님의 용서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고 존귀한 것인가를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여러분에게서 잠시 동안이라도 용서가 비취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신자에게는 절대로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멍에는 멍에고 짐은 짐이되 쉽고 가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알게 된 기쁨과 감사로 인해 나타나는 자연스런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마음에 쉼이 있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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