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0.03.07 18:27

(78강) 안식일과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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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2:9-13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12091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마 12:9-13)

 

<설교>

사람이 서로 대화할 때 상대방의 말을 오해하여 다툼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말에 담긴 상대방의 의중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입장에서 자기 주관적으로 말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화에서 어려운 것은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말은 귀에 들린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보려고 하기보다는 귀에 들린 말을 자기 주관으로 판단하면서 단지 말투나 말의 내용만을 가지고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과 같은 오해가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대화는 다툼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자가 성경을 볼 때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중을 아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 주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하나님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말씀을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보다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고 무엇을 알게 하고자 하시는가?’에 중점을 둔다면 말씀을 오해하여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오류에는 쉽게 빠져들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자의 신앙의 방향을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입니다. 현대 교회의 신앙은 인간의 열심을 중점으로 하고 있습니다. 열심있는 인간의 실천과 행위야 말로 신앙의 열매이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같은 생각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신앙에 대한 생각이 그와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신앙을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행하는 일의 정도를 가지고 판단하려고 하지만, 신앙은 인간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의 의미를 깨닫고 그 일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이 생각하는 신앙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신앙의 방향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은지를 묻습니다. 우리가 볼 때 바리새인들의 이같은 물음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은 전혀 시빗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또한 특별한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고,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표면적으로는 안식일에 병을 고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대립이 발생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논쟁의 배경에는 신앙의 중요한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 묻습니다. 이것을 보면 유대인의 율법은 안식일에는 병을 고치는 것도 금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율법인 ‘미쉬나’에 따르면 안식일이라고 해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허용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데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 때문에 방치하여 죽게 하는 몰상식하고 인간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율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바리새인들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손 마른 병’입니다. 손 마른 병은 손이 마비되어 사용할 수 없는 장애는 있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병은 아닙니다. 때문에 안식일에 고치지 않고 다음 날 고쳐줘도 될 병이었습니다. 아마 당장 목숨이 위태로운 병자였다면 바리새인들이 그러한 질문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에 지장이 없는 사람을 안식일에 고치는 것은 그들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기에 그같은 질문을 한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11,12절)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안식일이라고 해도 구덩이에 빠진 양이 있으면 끌어 낼 것이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양보다 귀한 사람을 고쳐주는 것이 옳지 않느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해는 예수님을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것을 권장하는 분으로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안식일은 뭔가를 금하는 날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날이라고 말합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돕고 봉사하는 선을 행하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에 벗어난 이해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안식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규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안식의 세상이 따로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만드신 안식의 세상으로 인도하시고 그 세상에서 안식을 누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해 안식일 규례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안식일 규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안식일 규례에서 안식의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고 안식일 규례를 지키는 것이 곧 자신들에게 복이 되는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안식의 세상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몸담고 사는 세상에서 누리는 복에 마음을 둔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복의 통로는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연히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는 면을 보입니다.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끌어내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양은 목축을 하는 유대인들에게는 큰 재산이기 때문에 안식일에 생명은 구할 수 있다는 규정으로 재산에 손해가 발생할 수 있는 경우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는 말로 예수님에게 시비를 겁니다. 만약 안식일이라고 해도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끌어내는 것을 옳다고 여기는 그들의 마음이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었다면 손 마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덩이에 빠진 양이 죽는 것을 재산의 손해로만 여겼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서는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이 안식일 규례를 아무리 세부적으로 만들고 준수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예수님이 안식일이 아닌 다음날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셨다면 바리새인들은 잠잠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도 유대교의 율법을 준수하는 분으로 말하면서, 결국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것은 안식일 규례를 어긴 것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또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7절)고 말했으면서도 율법에 매여 자비를 행하지 않는다고 비방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규례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나 마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자신들이 세운 규례에 사람들을 묶어 두려고만 했던 것입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신 말씀은 구덩이에 빠진 양을 끌어내는 것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고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고 하신 것은, 안식일이라고 해도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는 것인데 하물며 양보다 귀한 사람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한 선을 행한다는 것은 구덩이에 빠져 나올 수 없는 양을 끝어내는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을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신 것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하는 것은 예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선한 일, 그것이 인간에게는 능력이 되어 생명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대로 선을 행하자 그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이 우리에게 능력이 되어 우리를 구덩이에서 끌어내었고 생명이 되었음을 감사하자’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이 안식일 규례에 담긴 하나님이 만드신 안식의 세계인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이루어가는 세계가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자비의 일이 우리에게 선이 되어 우리를 구출하고 생명에 있게 한 주의 일을 믿고 감사하는 그것이 신자에게는 쉼이 되는 것이고 안식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에서 요구하는 규정만 잘 지키면 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성경에는 그런 신앙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교회 또한 신자를 어떤 규정으로 묶어 두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유대교의 길을 그대로 걸어가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행해야 할 것을 말하기보다는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이 우리에게 어떤 능력으로 다가왔는가를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자기 세상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그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공부하고 수고합니다. 그리고 그 꿈이 멀어지고 실패하면 낙심합니다. 인간이 원하는 세상을 설사 이루었다고 해도 그것이 행복이 아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인간이 원하는 행복 안에 허전함이 있고 헛됨이 있다는 것을 내다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어떤 세상을 살고 싶어 하든 그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영원한 세상에 마음 두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은 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께 있게 하신 현재의 자리에서 열심히 사십시오. 열심히 사시면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사망의 구덩이에 빠져 있는 인간에게는 힘이 되지 않고 능력이 되지 않음을 잊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신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행하신 선한 일, 즉 자비로 인해서 구덩이에서 구출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않는 신자라면 예수님의 은혜와 자비의 행하심에 감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돈이나 출세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써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선하심 안에 머무는 신자는 자신에게서 선한 행함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눈 앞에 삶에만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모두가 잠시 동안의 안개와 같은 것일 뿐입니다. 산더미 같은 돈을 깔고 사는 인생이라고 해도 모두가 일장춘몽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우리의 실상을 본다면 우리는 사망의 구덩이에 빠진 인간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구출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선한 행위가 우리에게 베풀어진 자비입니다. 이 자비를 바라보며 감사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신자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은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규정을 지키고 준수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 은혜에 머물러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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