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5.08.29 17:10

(76강) 피차 복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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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5:18-21http://onlycross.net/videos/eph/eph-051821(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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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설교>

 

바울이 말하는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는 것은 때의 악함을 알고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즉 지혜는 때의 악함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지혜는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상식이나 생활 지혜, 이런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가 악하다는 것을 안다면 삶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때의 악함에 대해 무심한 분이 아니라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신자는 오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때의 악함에서 구원이 되시는 그리스도임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이 되고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믿으며 의지하는 자로 살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 있는 신자의 세월을 아끼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때의 악함을 인식하지 못하면 삶의 중요성을 구원이 되는 그리스도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두게 되는데, 이로 인해서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게 되는 것을 방탕, 즉 술 취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술에 취하면 자신의 행동을 알지 못하고 분별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처럼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의 악함을 분별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월을 아끼는 것이 무엇이고 바탕과 술 취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바울이 말하는 성령 충만의 의미도 알게 됩니다. 때의 악함을 분별하는 지혜로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 매일의 현실이 되어야 함을 아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방주를 자신의 참된 현실로 여기며 세상 모두가 어리석게 여기는 길로 가는 노아가 곧 성령 충만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0,21절에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헌신하라’는 말에는 익숙하지만 복종하라는 말에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복종은 상대방의 말이나 생각을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종은 강자와 약자라는 인간관계에서 나타납니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복종한다면 그것은 그가 나보다 더 강한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종하기보다 복종하게 하려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에는 세상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차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피차’라는 말은 이쪽과 저쪽 양쪽 모두를 가리킵니다. 즉 서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피차’라는 말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은 강자와 약자의 관계입니다. 서로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자와 약자라는 관계가 무너진 상태에서의 복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피차 복종하라”는 말 앞에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과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즉 피차 복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신자의 세계에 속한 것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는 자신의 강함이나 영광이 없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심으로 죄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감사한다면 그는 자기 이름,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좇는 길이 아님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 또한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공경하고 높이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자기 영광을 위한 길로 가지 않으시고 죄인과 약자의 길로 가신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기에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은 자기 영광을 추구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 의도 자체가 잘못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 부르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자도 아니고 교회에서도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게 될 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자들이 함께 한 모임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피차 자기 이름을 높이거나 내세우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서는 모두가 낮아진 자로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충만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에서는 ‘누가 헌금을 많이 하는가?’‘누가 기도를 많이 하는가?’‘누가 성경을 많이 보는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기 이름을 추구하고 자신의 높음에 마음을 둔 세상의 모습일 뿐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만약 피차 복종이 안된다면 그것은 서로가 자기 이름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증거 되어야 할 피차 복종은 누군가가 형제의 유익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할 때 감사하며 말없이 그의 수고와 헌신에 함께 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만약 그리스도를 경외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에 비해 자신이 밀린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수고와 헌신을 폄하하고 싶은 마음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즉 시기와 질투로 대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복종은 없습니다. 한국교회에 거의 관행처럼 뿌리 깊이 박혀 있는 목사에 대한 복종 역시 성경에는 없습니다. 목사에게 복종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뜻이고 성경적인 것처럼 말하는 그가 그리스도를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밖에서 말씀을 멸시하는 자 일 뿐입니다.

 

 

롬 5:7,8절에서 바울은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주지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칭송받는 선인을 위해 죽는다면 그 죽음이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남을 위해 죽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가치가 없는 죄인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증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높은 자와 낮은 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피차 복종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가능하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소위 일 잘하는 몇 사람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탐심의 시각에서 교회를 바라보기 때문에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찾는 것이고 그들을 교회 기둥으로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교회는 이미 차별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일을 많이 하고 잘하는 사람들의 말이 곧 힘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한 신자가 함께 하는 교회가 아니라 술 취한 사람들이 모여서 타인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말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높임 받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남들보다 일을 많이 하고 중직을 맡고 있기 때문에 높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다면 차라리 그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교회 일도 하지 마시고 중직이라고 생각되는 그것도 내려놓으십니다. 교회에 중직이라는 것도 없지만 중직이라는 것으로 직분을 구별하는 그러한 사고방식이 술 취한 것이고 방탕한 것이며 결국 제 집을 찾아가지 못하고 길거리가 자기 집인 양 잠드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기에 차라리 모두 내려놓으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옳고 잘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고침 받으며 세워져 가야 할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관계에서는 ‘당신 틀렸어’‘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야 돼’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가 판단할 위치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자기 이름을 높이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같은 길을 가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 관계에서 나타나야 할 것은 피차 복종하는 것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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