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5.09.12 19:36

(78강) 부모와 자녀

조회 수 3638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엡 6:1-4http://onlycross.net/videos/eph/eph-06010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출 20:12; 신 5:16

3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설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남편과 아내의 문제가 단지 신앙인으로서 좋은 부부 관계를 이루는 방법을 말해주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본문의 부모와 자식의 관계 또한 신앙인의 좋은 가정을 이루는데 초점을 두고 이해할 내용이 아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과 같은 내용을 좋은 가정이 되기 위한 교훈으로 이해하는 것은 신자로서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이 곧 믿음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에 뜻을 두지 않습니다.

 

 

좋은 가정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부부가 서로 다투지 않고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의 말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가정을 화목한 가정이라고 하면서 신자는 이러한 가정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온 가족이 교회에 출석하고 봉사하고 섬긴다면 부족함이 없는 믿음의 가정으로 칭송되면서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가정이 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일까요? 아마 대부분이 ‘그렇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송받는 가정이 된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그것이 옳다면 하나님은 신자가 좋은 가정 만드는 일에 집중하여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오셔서 가정 사역에 중점을 두고 일하셨어야 합니다.

 

 

사도들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은 가정 사역과는 무관합니다. 좋은 가정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가정의 의미부터 새롭게 정립되어야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좋은 가정이 된다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엡 6장은 에베소 교회를 향한 편지를 마무리 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존재이며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해 왔습니다. 그런데 편지를 마무리해가는 시점에서 갑자기 바울이 좋은 가정 만드는 일에 관심을 두고 부부 문제와 부모 자식의 문제에 대해 가르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한 부모에 대한 순종에는 한 가지 전제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 안에서’입니다.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면 주 밖에서는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있는 부모에게는 순종하고 예수를 믿지 않는 부모에게는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교회 가지마’라는 부모의 말에는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일까요?

 

 

‘주 안에서’는 그렇게 단편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 안에서’라는 말을 단편적으로 생각하거나 이 말에 주의 하지 않고 자녀의 순종에만 초점을 두기 때문에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 되기를 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서는 옳은 행위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을 옳다고 말하는 것은 순종이 단지 부모에 대한 자녀의 의무 차원이 아니고 유교가 말하는 효의 의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윤리와 도덕을 뛰어 넘은 다른 의미의 순종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는 주가 다스리는 세계를 뜻합니다. 주가 누구인가 하면 자신의 피 흘리는 죽음으로 자기 백성을 죽음에서 건지신 주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는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죽음에 있는 나를 생명으로 이끌어 내신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주의 세계에서 옳다고 인정되는 것은 자녀로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의 뜻은 영원한 죽음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을 죽음에서 건지고 생명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말할 수 없는 주의 은혜임을 알게 하고 주를 높이고 찬송하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순종을 말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을 때 가능합니다. 따라서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한다면 부모의 뜻이 높고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것임을 알게 됨으로 자신의 뜻을 내려놓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뜻보다 주의 뜻이 더 높음을 알고 주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뜻에 순종하고 주의 뜻 아래 있는 것이 신자의 의라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 안에 있게 된 것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의 뜻에 의해 되어진 결과입니다. 우리의 뜻은 늘 육신을 향해 있고 세상을 향해 있을 뿐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이 우리의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뜻으로는 주께로 향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을 주 안에 있게 됨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 안에 있게 된 것도 주의 뜻에 의한 주의 이루심의 결과임을 알게 됨으로 주를 높이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 안에서 주의 뜻에 눈이 열린 신자는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보다 주의 뜻이 나를 이끌어 가시고 주의 뜻대로 되는 것만이 불의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이 가능하게 되는 길임을 믿게 됩니다. 때문에 주의 뜻을 높이고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주의 뜻 안에서 거룩한 자로 여김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뜻을 이뤄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러한 의미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단지 육신을 이롭게 하는 내용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3절에 대한 곡해입니다. 대개 보면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말을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했을 때 받게 되는 복으로 이해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면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늘 땅에서 잘되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육신의 잘됨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잘되고’라는 말을 육신이 잘되는 것으로 이해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서 장수하는 것을 오래 생존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신자에게 잘됨은 주 안에 있게 된 그 자체입니다. 주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붙들려 있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늘의 모든 은총과 복아래 있게 된 것이 잘 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우리가 복을 누리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우리 또한 주 안에서 순종하는 자로 여김 받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주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로 여김 받는 잘됨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되고’라는 말도 주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이미 성취된 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장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장수를 인간의 년 수로 생각하면 오래 살수록 장수했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장수의 기준은 사라지게 됩니다. 90살을 살면 장수했다고 하겠지만 100살을 산 사람 앞에서는 장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장수는 단지 생존의 연수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생존 연수는 의미가 없습니다. 언제 세상을 떠난다 해도 주 안에서는 영광된 생명의 나라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는 날이 좋은 날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지금 현재 생존한 것 자체가 장수입니다. 몇 년을 살고 있는지를 떠나서 장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에게 순종하면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이미 잘된 자고 장수한 자라는 뜻이 됩니다.

 

 

본문은 혈육의 관계에 있는 부모와 자식의 문제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그리스도의 의로 인해 자녀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께 그리스도의 의를 전해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관계에서 신자는 서로가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서로가 그리스도를 전하고 함께 주 안에서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해야 하는 관계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는 피차의 복종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아비가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하는 것 역시 주 안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물론 그리스도를 믿는 부모로서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도 생각해 보야 할 문제이지만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교회라는 관계로 함께 할 때 우리를 양육하는 것은 주의 교훈과 훈계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때문에 교회는 늘 주의 교훈을 전하는 일에 힘을 써야 하고 그 교훈이 우리를 훈계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모두가 자녀이고 부모입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109
2015.10.31 431 에베소서 (83강) 구하라 신윤식 3348
2015.10.24 430 에베소서 (82강) 진리의 사람 신윤식 3396
2015.10.03 429 에베소서 (81강) 씨름의 상대 신윤식 3624
2015.09.26 428 에베소서 (80강) 전신갑주 신윤식 3909
2015.09.19 427 에베소서 (79강) 종과 상전 신윤식 3478
2015.09.12 » 에베소서 (78강) 부모와 자녀 신윤식 3638
2015.09.05 425 에베소서 (77강) 그리스도와 교회 신윤식 3579
2015.08.29 424 에베소서 (76강) 피차 복종하라 신윤식 3595
2015.08.22 423 에베소서 (75강) 성령의 충만 신윤식 3565
2015.08.15 422 에베소서 (74강) 세월을 아끼라 1 신윤식 3605
2015.08.08 421 에베소서 (73강) 어둠의 일 신윤식 3567
2015.08.01 420 에베소서 (72강) 빛의 열매 신윤식 3563
2015.07.25 419 에베소서 (71강) 빛의 자녀 신윤식 3540
2015.07.18 418 에베소서 (70강) 헛된 말 신윤식 3293
2015.07.11 417 에베소서 (69강) 성도에게 마땅한 일 신윤식 3356
2015.07.04 416 에베소서 (68강) 하나님을 본받음 신윤식 3435
2015.06.27 415 에베소서 (67강) 성령의 근심 신윤식 3458
2015.06.20 414 에베소서 (66강) 선한 말 신윤식 3201
2015.06.13 413 에베소서 (65강) 도둑질 하지 말고 신윤식 3320
2015.06.06 412 에베소서 (64강) 분을 품지 말고 신윤식 4558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