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5.01.11 09:49

(44강) 사랑을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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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3:14-19http://onlycross.net/videos/eph/eph-031419(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설교>

 

사도 바울은 사랑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랑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면 쉽게 ‘하나님, 이웃을 사랑하게 해 주십시오’라는 식으로 사랑의 실천을 위한 기도를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의 착각은 일단 사랑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랑에 대해서는 실천이 힘들고 중요한 것이지 사랑을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을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의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사도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고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라는 말은 우리가 알아야 할 사랑은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랑이 아니라면 그 어떤 고상한 실천과 감동을 주는 행위가 있다고 해도 사랑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현대 교회는 오로지 사랑의 실천만을 요구합니다. 교회가 요구하는 사랑의 실천은 예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과 차이가 없습니다. 아예 동일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랑을 말하는데 정작 교회는 인간관계가 돈독해지는 사랑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치 그리스도의 사랑인 것처럼 말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보여주신 적이 없습니다.

 

 

사랑은 17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심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후 5장에서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죄인 된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것입니다. 그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게 되면 사랑을 위해 죽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됨으로 그 사랑에 붙들리게 되고 강권하심을 따라 내가 사는 길이 아니라 주를 위해 죽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시고 사랑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랑에 의해 맺어지는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순교할 자리를 찾아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서 우리가 드릴 것은 없습니다. 제아무리 수준 높은 실천이 있다 해도 그것이 주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더러움을 확인하게 될수록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사랑을 위한 기도입니다. 때문에 맹목적으로 하는 사랑의 실천을 위한 기도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절에 보면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말합니다. 사랑에 무슨 너비가 있고 길이가 있고 높이가 있고 깊이가 있겠습니다. 이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측량 불가를 의미합니다. 무한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신비스럽고 놀라운 것이 사랑이기에 그 사랑에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사랑이 우리의 충만이 되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위해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으로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습니까? 성품이 변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십자답다는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바울은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시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이 충만이 되기를 기도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충만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는 것으로 그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의 좋은 것으로 풍성히 채워주셔서 부족함이 없게 해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담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사랑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존재로 있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랑을 원하십니까? 여러분이 추구하는 세상의 것으로 채워지는 사랑을 원합니까? 그것이 신자가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신자는 참으로 가난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과 동일하게 세상의 것으로 울고 웃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세상의 것을 받고 채워지는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사랑을 더 받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신자가 되려 하고 그런 의도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우리가 붙들려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묻지 않고 그리스도가 오셔서 함께 하십니다. 따라서 신자의 싸움은 사랑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어서 안 됩니다. 나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보는 싸움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세계가 얼마나 복되고 충만한가를 알아가는 싸움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으로 충만해지고 싶어 하는 것은 그것이 세상에서 자랑거리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된 바울에게 존귀한 것은 사랑이지 세상의 보물이나 보화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기독교가 잘못된 것이 이것입니다. 믿음을 얘기하면 ‘믿음이 무엇인가?’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받는다’로 향합니다. 알아야 한다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알아야 참된 신앙으로 나아간다는 문제보다는 받는 것에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받기 위해서는 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기술적인 측면으로 강조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간과합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조차도 자기 것이 아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 때문에 사랑의 풍성함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랑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니 참으로 답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것은 영원한 멸망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멸망에서 우리를 구출하시고 생명으로 옮기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일을 예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때문에 사랑을 아는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굴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기 의와 행함을 내어 놓지 못합니다. 의와 행함이 있지만 내어 놓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의와 행함으로 여겼던 모든 것들이 지푸라기처럼 부질없는 것으로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부요하고 존귀한 것인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확인하십시오. 사랑을 확인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자랑 삼아 얘기하는 기적의 체험이란 것들이 얼마나 빈약한 것들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자기 체험을 붙들고 체험을 신앙의 근거와 힘으로 삼고 있을 떼 그리스도가 마음에 있는 신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에 마음을 두며 그 사랑이 힘이 되고 근거가 되는 신앙의 길로만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여러분의 신앙의 내용으로 채워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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