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5.03.08 09:45

(51강) 교회의 통일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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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4:4-6http://onlycross.net/videos/eph/eph-040406(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5.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6.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설교>

 

교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 됨’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렵다 해도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악과 이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한 몸 사상은 깨어졌고 철저히 ‘너는 너 나는 나’라는 구별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한 몸의 상태를 경험한 적도 없는 우리의 몸 전체에 배어 있는 것은 너와 나라는 구별이기 때문에 한 몸에 대해 말은 할 수 있어도 실감할 수는 없는 한계에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가 말한 교회의 하나 됨은 우리가 이루고 있는 집단적 성격의 교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으로 인해 은혜 안에 있게 된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앙이라는 명목으로 굳건히 결속하여 연합하기를 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시고 모으신 하나 됨에서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현상이 교회의 부흥과 성장 같은 바벨탑 쌓기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탑 쌓는 것을 중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동일한 생각으로 동일한 말을 하게 되는 것이 몸이 하나고, 성령도 한 분이고, 주도 한분이고, 믿음도 하나고 세례도 하나인 관계에 묶여 있기에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우리의 부패한 인간성으로는 늘 구별하고 쪼개지고 흩어지는 것 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여 한 몸의 관계로 거룩한 은혜에 있게 하셔서 부활하게 하시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한 몸 사상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하나 됨은 동일한 은혜 안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은혜가 동일하기에 동일한 감사가 가능한 것이고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이 모으심으로 인해 나타나는 모습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게 보면 현대 교회는 관심 자체가 잘못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의 방향도 내용도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가 단지 인간의 집단으로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으신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보다 내 몸 담고 있는 교회가 이상적인 훌륭한 모습으로 증거 되는 것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밟고 예수님을 이용하여 내 교회를 드러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교회로 말미암아 드러나야 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 근거가 되는 예수님의 피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여기에 생각이 같고, 뜻이 같으며 말이 같은 그것을 교회의 하나 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고 성령이 한분이고 주도 한분이기 때문에 서로 다른 말이 아니라 동일한 말을 하게 됩니다.

 

 

우린 애당초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모인 어떤 사람도 본래부터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저주와 영원한 죽음에 갇힌 처지였을 뿐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와 다시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이러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건짐 받았고 생명으로 이끌림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구원을 주시겠다는 취지 때문이 아닙니다. 은혜를 알게 하심으로 은혜를 높이고 찬송하게 하여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인 교회에서 나타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일뿐이지 인간의 이름도, 공로도, 교회도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의 교회는 교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교회의 교인으로 모이는 사람들끼리의 친분 관계가 돈독하고 여러 행사를 부지런히 하며 교인들이 교회에 관심을 갖고 열심을 내는 그것으로 좋은 교회라는 인정을 받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과연 사도가 말하는 교회가 이런 것이었습니까? 아무리 살펴봐도 사도는 이러한 교회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아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교회가 사도의 마음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성도의 교제를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성도의 교제를 믿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서로 교제하면 될 일을 왜 믿음에 포함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성도의 교제가 우리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능력으로만 가능한 일이기에 하나님께서 백성으로 부르신 자들을 서로 교제하는 관계에 있게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결국 사도가 말하는 성도의 교제는 인간의 친분관계를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성도가 동일한 은혜를 깨닫고 함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관계에 있다면 친분이 있는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친한 관계의 친분이 아니라 차별과 높고 낮음이 없는 동일한 백성으로서의 친분이고, 서로의 뜻과 생각과 소망하는 것이 같음으로 나타나는 친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복음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성도의 교제를 단지 인간적 친분 관계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서로 마주보고 인사하며 악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이 나쁘다고 할 것은 없겠지만 그런 것으로 서로 사랑하고 교제하는 관계가 될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목사의 말에 따라 웃고 인사는 하겠지만 옆에 미워하는 사람이 앉아 있는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억지로 참고 인사한다고 해도 그것을 성도의 교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언급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본질을 따지면 진노의 자녀, 즉 마귀 자식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마귀의 세력에서 구출하시고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의 조건과 자질로 인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다른 사람의 믿음과 구원의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시고자 하신다면 누구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했습니다. 스데반의 말은 용서의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자신을 죽이는 그들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한다면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스데반을 죽인 현장에는 사도 바울, 즉 사울이 있었습니다. 만약 스데반이 “복음을 전한 나를 죽이는 너희는 모두 복음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에 갈 것이다”라고 외쳤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사울을 부르시고 사도 되게 하신 것으로 스데반의 말은 자신이 어떻게 부름 받았는지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결과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 설교한 본인조차도 자신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될 뿐입니다.

 

 

‘나의 신앙’은 없습니다. 있다고 해도 그것은 내가 만들어 낸 인간적인 것일 뿐입니다. ‘나의 신앙’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신앙을 명분으로 나를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신앙’을 내려놓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을 내려놓게 되면 남는 것은 나를 나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바닷물을 끓이면 하얀 소금만 남듯이 ‘나의 신앙’이 증발되고 나면 남는 것은 하나님의 크고 무궁한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증거하고 나타내는 것이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이유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두고 함께 한다면 우리는 동일한 말을 하게 됩니다. 그것을 하나 된 교회라고 이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모아지고 은혜를 말하고 들을 때 기쁨이 있는 하나 됨으로 세워져 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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