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5.04.26 09:11

(58강) 자라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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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4:13-16http://onlycross.net/videos/eph/eph-041316(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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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설교>

 

신자는 신앙이 자라가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필히 자라가기 때문에 신앙이 자라지 않는다면 생명이 없는 죽은 신앙이라는 말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15절)고 말합니다. 이 구절만 보면 신자는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라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주의 깊게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라가는 것을 성숙의 의미로 많이 이해합니다. 마치 어린나무가 큰 나무로 자라가는 것처럼 신자의 신앙도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에서 점차 크게 자라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갖추어 가는 것으로도 이해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신자로 예정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의 사람은 비록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았다 할지라도 아직 신앙이 미숙하여 그리스도의 품성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품성을 본받아서 신앙이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그럴듯한 내용으로 들릴 것입니다. 신앙이 장성하여 그리스도의 품성을 닮아가고 거룩한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것이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자라감은 신앙생활의 방향이고 목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영성훈련’‘품성훈련’등에 마음을 두고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이든 뭐든 모든 면에서 현재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욕망에 의한 미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사도 바울이 이러한 신앙의 자람을 염두에 두고 본문의 말을 했을까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만약 신앙의 자람이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고 그 성품으로 심령이 충만히 채워져 가는 것이라면 한번 자란 신앙은 퇴보가 없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 신앙이 자랐는데 또 다시 원래의 상태로 퇴보한다면 결국 그리스도의 성품이 사라졌거나 약화되었다는 뜻이 되는데 그것을 그리스도의 성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성품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조금씩 변화된다는 뜻인데 이것부터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부패한 성품은 결코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부패함에 대해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17:9)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처럼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마음을 조금씩 정화시켜서 깨끗해져가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 과연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이 부패한 마음을 정화시킨다고 해서 부패한 마음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이 사라질 수 있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인간의 부패한 마음은 정화될 가능성이 없습니다. 또한 부패한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도 요구도 아닙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 지금까지 인간의 마음은 정화된 적이 없다는 것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무슨 의미로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라고 말할까요? 먼저 그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은 우리의 성품이나 인격이 달라지고 성숙되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고 자라가야 할 방향을 그리스도로 제시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은 그리스도를 향해 자라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많은 기독교인들이 속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간다고 했을 때 목표와 방향이 어디로 향해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일까요 자신일까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서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증거한다면 그리스도를 방향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자신이 목표고 방향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고자 하게 되면 자신이 어느 정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갔는지, 어떤 수준, 어떤 단계에 도달했는지 늘 자신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이미 관심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자신에게로 향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고 있다는 착각에 머물게 되기 때문에 오히려 크게 위험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서 성품이 달라지는 것을 신앙의 자람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신자의 모든 목표와 방향이 그리스도에게로만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심이 자신에게로만 향해있던 사람이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게 되면서 마음이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굳게 세워져 가는 것이 곧 사도가 말하는 신자의 자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어린아이의 수준에 있다는 것은,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유익과 즐거움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유익과 즐거움을 들고 미혹하는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지는 것이고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이 어른으로 자라는 것은 자신에게로만 향해있던 관심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과 영광을 위한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신자라는 사실에 눈을 뜸으로 인간의 유익과 즐거움을 미끼로 미혹하는 어떤 속임수와 유혹에 빠지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질적 변화에 초점을 둔 성화 또한 속임수와 유혹의 하나로 접근하게 된다는 점을 주지해야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라는 말도 사랑을 실천하라는 의미로 이해하기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행하게 되는 참된 것이 무엇인가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덮으시고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나타나는 참된 행함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있지 않고는 안되는 그 일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피로 용서 받은 자로 바라보며 누구와도 차별이 없이 그리스도의 은혜로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함은 우리의 성품에서 나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받은 신자가 그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에 붙들리게 됨으로 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행함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자기 행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신에게 돌아올 공로도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그리스도만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이기에 교회는 인간의 공로가 중심이 된 자랑과 경쟁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이 자란다는 것은 인간의 부패한 마음의 변화를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부패한 마음 그대로 살아갈 뿐입니다. 신자는 변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패함을 알지 못하고 부인했던 우리가 모든 허물과 악함과 죄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벌레만도 못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에 눈을 뜨고 마음이 열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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