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5.05.02 20:21

(59강) 이방인의 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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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4:17-24http://onlycross.net/videos/eph/eph-04172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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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설교>

 

우리는 교회를 단지 사람의 모임으로만 바라보는 경우가 많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는 우리의 생각을 넘어서는 영광과 신비의 세계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과 신비의 세계에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신비를 세상에 나타내어야 할 증인으로 부름 받았고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허락되어진 이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교회됨을 이루며 하나님의 영광됨을 증거하고 찬송하는 것보다는 교회로 모여서 누리는 인간적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개인적 삶의 복을 누리는 것에 더 관심을 두게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로 부름 받았다는 것보다는 자신의 존재 가치에 더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하는 지체를 유익하게 하는 일에 자신이 죽는 길로 가는 것보다는 자기 자존심을 위해 지체를 죽이는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행하게 되는 참된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받아 누리게 된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한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로 용서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는 것은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낮아지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출하시고 영광의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고난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머리 또한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그리스도로 서로 연결된 관계에서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공급받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러한 영광된 관계가 우리의 옛 습관으로 인해 훼방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예수님의 피 흘리심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을 딛고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방인과 동일하게 인간적 관계만을 드러내며 다툼과 분열과 시기로 나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의 가치를 교회가 무너뜨리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행함을 허망한 마음에 의한 것으로 말합니다. 허망의 사전적 뜻은 기대와 달리 보람이 없고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적 의미로 이해한다면 헛된 것을 믿는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헛된 것, 다시 말해서 생명이 되지 못하는 것을 좇는 것이 이방인의 삶이기 때문에 그들의 모든 것은 허망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함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에 대해 이방인은 인정하지 않고 반발합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나름 보람 있는 일을 하며 선을 행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생명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오고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는다면 어떤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세상으로부터 칭송을 듣는다고 해도 결국 사망에 갇힌 자일뿐입니다. 그러므로 허망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허망한 행함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 삶 자체가 허망한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그리스도와 연결된 관계에서 그리스도로부터 하늘의 신령한 복을 공급받습니다. 세상에서의 높고 낮음은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습니다. 신령한 복은 세상에서의 신분이나 위치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셔서 자녀 되게 하신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도가 함께 감사하고 기뻐하고 누리는 것이 교회입니다.

 

 

신자는 ‘한번 살면 끝나는 인생인데 보란 듯이 떵떵거리고 잘 살아보자’는 세상의 방식과 상관없는 존재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삶의 방식이 허망한 것임을 보여주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재합니다. 이러한 신자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야 하고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 보신다면 그 답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옛 습관이 항상 유혹의 욕심을 따르게 하고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길로 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로 사는 것이 자신을 바탕에 방임하는 것이고 이방인과 똑같이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면 삶의 방향도 목표도 오로지 자기 자신으로 세워져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교회는 방향과 목표를 상실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마다 목표가 있고 표어가 있지만 거의 모두가 교회를 목표로 하는 표어일 뿐입니다. 방향이 그리스도가 아닌 교회로 되어 있기에 목표 역시 교회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되고, 확장되는 모든 것이 교회를 목표로 하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이 다만 인간의 욕심을 따라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허망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신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허망함을 눈치 채지 못하기에 자신을 방탕에 방임한 채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는 길로 가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는 영광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이 이방인의 허망한 삶과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목표 또한 세상이 아니기에 같을 수가 없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의지하고 힘으로 여기는 모든 것이 이방인과는 다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자의 삶은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신자는 이미 그리스도로 충만한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된 관계에서 하늘의 신령을 복을 받았고 그 복의 세계에 들어와 있기에 부족하다고 할 것이 없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자 됨의 가치를 망각한다면 그리스도로 감사하는 것 보다는 이방인과 동일하게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충족시키려는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방인의 허망한 행함의 중심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즉 자기 사랑이 허망한 행함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신자가 다른 것은 자기 사랑이 부인되고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되는 길을 자신의 새로운 길로 삼은 것입니다. 오직 그 길에 순종하기를 원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이 부인되어야 함을 알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찾습니다.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의 도구로 존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러한 사람들로 모인다면 자기의 유익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교회에는 자신의 삶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합당함이 무엇인가에만 마음을 둘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사망에서 건지셨다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세상에 보내시고 허물 많은 우리를 흠 없는 자녀로 삼으셔서 교회로 모이게 하심을 생각하십시오. 그 모든 일의 중심에는 그 모든 일을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삶의 이유와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이것을 망각한다면 우리 또한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허망한 마음으로 행하며 자신을 방탕에 방임한 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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