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9.07 10:02

(28강) 아버지께 나아감

조회 수 3606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엡 2:18http://onlycross.net/videos/eph/eph-0218.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구원에 해당된다고 믿었습니다. 이방인은 개만도 못한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된다는 것은 세상이 뒤집어져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의 동일한 은혜로 구원이 임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증거 했던 복음이고 여러분은 이 같은 복음의 내용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잘 알고 있다고 하는 우리에게서 드러나는 표면적인 신앙의 모습이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내용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까? 아닙니다, 우리 역시 유대인과 다를 바 없는 양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같은 우리의 실상을 면밀히 파악하고 믿음의 현실에 대해 바르게 알지 않으면 복음을 말하되 하늘의 비밀과 기쁜 소식으로서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의 길로 가게 될 뿐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혹시 이러한 말에 반발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복음을 잘 알고 있고 복음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믿음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반발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잘하고 계십니까? 하지만 뭐가 신앙인으로써 잘하는 것인지를 제대로 알고 계셔야 합니다. 대개 보면 신앙생활 잘하는 것을 교회 일에 열심히 봉사하고 좋은 일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것도 필요하긴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잘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1절에 보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렸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존재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살리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하지만 ‘살았다’는 것에 초점을 두기 전에 분명한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인간은 스스로 살아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살았기 때문에 산자로서 산자의 길을 가고 있다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된 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결과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이 아버지께 나아간다면 오직 죽음만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은 자격이 주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 자격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자녀라는 신분입니다. 그리고 이 신분은 유대인의 몫도 아니고 이방인만의 몫도 아니며 신앙생활을 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의 택한 자에게만 허락된 은총인 것입니다.

 

 

아버지께 나아갈 때는 유대인과 이방인 구별이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민족적 구별, 외적 조건, 행함의 차이, 이런 모든 것들이 아버지께 나아감에 있어서 필요하거나 기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아버지 앞에서는 모두가 허물과 죄로 죽은 존재일 뿐이고, 그런 나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리셨다는 이 믿음만 용납될 뿐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자신의 모든 외적 조건과 행함이 부인되어지는 것이 바로 잘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또한 우리의 지식과 행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것이기 때문에 내 힘으로 잘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복음 안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입니다.

 

 

죽었던 자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신분이 된 이 비밀을 아는 신자는 신앙을 율법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을 기준으로 한 행위의 구분도 없습니다. 잘하고 못하고의 판단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어서 그의 의로 우리가 의롭다 여김 받음을 알 뿐이고 하나님께서 기약하신 대로 우리의 모든 길이 열려있음을 믿을 뿐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비밀입니다.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는 것은 복음의 중심적인 내용입니다.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된 그 일에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모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한다는 말이 전제하는 것은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는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2절에서는 불순종의 아들, 3절에서는 진노의 자녀, 14절에서는 원수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래 신분입니다. 이런 우리가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면 그것은 과거의 모든 신분에서 벗어났음을 뜻합니다. 불순종의 아들, 진노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고 하나님과 원수라는 관계에서도 역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는 것은 새로운 신분이 주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우리를 새로운 신분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으실 때 성소의 휘장이 찢겨진 것으로도 설명됩니다. 성소의 휘장이 있을 때 유대인은 오직 율법에 의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대로 대제사장만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날, 속죄일에만 휘장을 통과해서 거룩한 지성소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성소의 휘장이 찢겨졌다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옛 언약의 통로가 폐지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의 은혜라는 새 언약이 통로가 되어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그들 역시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될 수 없는 부정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유대인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단지 성전이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성전에 이방인의 뜰을 따로 두어 구분함으로써 자신들과 이방인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었지만 실상은 그들도 이방인과 동일하게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었음을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골 1:20절을 보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말합니다. 3:15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사도의 증거대로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진 것이 하나님과의 화평입니다. 하나님과 원수의 관계에 있던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고 화평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함과 의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졌다는 이 사실이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셨습니다. 둘이 한 성령 안이라는 것은 차별 없는 성령이라는 뜻입니다. 방언을 하고 병을 고친다고 해서 특별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 안에 있는 신자에게서는 차별과 판단이 나올 수 없으며 그것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주장하는 것이고 평강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은 신자로 존재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는 한 몸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뜻도 아니고 우리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관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되어졌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의 관계는 필히 한 몸으로 증거되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잘했다고 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하루하루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눈에 못난 자로 보이는 그 사람도 차별 없는 동일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몸이며 서로에게 평강을 빌어주어야 하고 우리 안에 평강이 흐르도록 힘쓰는 것이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는 아버지께 나아가기 위해서 열심히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고, 아버지의 풍성한 은혜의 세계에 들어온 자로 함께 하고 있음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주어졌고 성취된 세계에 있기에 우리가 성취하고 받아야 할 것이 없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화목의 세계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당연한 것은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신자로 서로의 평강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판단도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판단과 차별을 감춘 채 평강을 빌어준다면 그것은 악한 위선일 뿐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여러분의 관계에서도 화목과 평강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123
2015.01.04 391 에베소서 (43강) 속사람의 강건 신윤식 3722
2014.12.28 390 에베소서 (42강) 영광의 풍성 신윤식 3381
2014.12.14 389 에베소서 (41강) 사도의 기도 신윤식 3451
2014.12.07 388 에베소서 (40강) 담대함과 확신 신윤식 3584
2014.11.30 387 에베소서 (39강) 예정하신 뜻 신윤식 3694
2014.11.16 386 에베소서 (38강) 하나님의 지혜 신윤식 3481
2014.11.09 385 에베소서 (37강) 교회로 말미암아 신윤식 3400
2014.11.02 384 에베소서 (36강) 은혜를 주신 이유 신윤식 3696
2014.10.26 383 에베소서 (35강) 복음을 위한 일꾼 신윤식 3479
2014.10.19 382 에베소서 (34강) 복음으로 말미암아 신윤식 3490
2014.10.12 381 에베소서 (33강) 그리스도의 비밀 신윤식 3721
2014.10.05 380 에베소서 (32강) 은혜의 경륜 신윤식 3795
2014.09.28 379 에베소서 (31강) 처소 신윤식 3482
2014.09.21 378 에베소서 (30강) 터 신윤식 3431
2014.09.14 377 에베소서 (29강) 교회 신윤식 3563
2014.09.07 » 에베소서 (28강) 아버지께 나아감 신윤식 3606
2014.08.31 375 에베소서 (27강) 한 성령 안에서 신윤식 3591
2014.08.24 374 에베소서 (26강) 하나님과 화목 신윤식 3525
2014.08.10 373 에베소서 (25강) 화평 신윤식 3670
2014.08.03 372 에베소서 (24강) 가까워졌느니라 신윤식 3654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 26 Next
/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