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11.16 09:57

(38강) 하나님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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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3:10-11http://onlycross.net/videos/eph/eph-031011(2).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설교>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각종 지혜’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이 영원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영원부터 예정하신 뜻이라면 하나님은 오직 이 뜻을 세우시고 이루시기 위해 모든 일을 행하셨다는 의미가 되고, 교회의 존재 이유는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는데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일까요? 고전 1:22-24절을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합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일이 곧 지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전 1:18절에서는 십자가의 도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한 것은 세상은 도무지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생각지도 못할 방식에 의한 구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보다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에 의한 구원이기에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지혜를 주심으로만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도가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인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신 것만을 지혜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교회가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 구원은 말하면서도 십자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십자가도, 신앙도 자기 구원을 위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우리를 구원하셨기에 그 보답으로 신앙 좋은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한다는 발상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멀어지는 한국교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절을 다시 보면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구로 삼으신 교회를 보면 과연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할 만큼 뛰어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현대 교회의 외적인 현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교회로 부름 받은 우리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적어도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고자 하신다면 그 교회에 모이는 신자는 신앙이 뛰어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자신을 보면 도무지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할 만한 자질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 모습 그대로 부르셔서 교회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7절에 보면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부르신 것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후가 아닙니다.

 

 

1:4절에 보면 하나님은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고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을 복음을 위한 일꾼으로 부르고자 하신 것은 이미 창세전에 택하시고 예정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일꾼으로 택한 바울을 복음의 핍박자로 활동하도록 두고 보셨을까요?

 

 

사도 바울의 손에 스데반이 죽었습니다. 복음의 핍박자로 활동했던 바울의 전적 때문에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실 외적 조건으로 판단하자면 바울은 열 두 사도에 비해서 복음의 일꾼으로 부적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에 비하면 그는 오히려 핍박자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어릴 때부터 신앙의 교육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자랐다면 복음의 일꾼으로 활동하는데 있어서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를 넘어설 수 없는 우리의 한계입니다.

 

 

만약 바울이 어려서부터 예수님을 알았고 참된 신앙인으로 자랐다면 지금의 바울이 가능했을까요? 바울은 자신을 두고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했습니다. 딤전 1:15절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했고, 고전 15:8절에서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로 고백하고 이어서 9절에서는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는 바울 같은 인물이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을 보면서 바울의 겸손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바울이 신앙이 좋았기 때문에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있었고, 그 겸손에 의해서 그러한 고백을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덕목을 겸손으로 가르치면서 ‘겸손해지자’라는 교훈적인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의 고백이 겸손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에 의한 겸손이라면 왜 다른 사도들에게서는 바울과 같은 고백을 들을 수 없는 것일까요? 열 두 사도들의 믿음이 바울보다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바울의 고백이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복음의 핍박자였던 자신의 실상으로부터 나오는 고백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죄인의 괴수,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라는 고백은 누구보다 사도 바울에게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울을 바울 되게 하신 것에서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마음껏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바울이 복음의 핍박자로 살도록 두고 보셨다가 일꾼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능력의 어떠함을 보이신 것이고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풍성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알게 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화는 바울처럼 하나님의 구원 앞에서는 누구나 작은 자일 수밖에 없고 죄인의 괴수일 수밖에 없으나 십자가의 도로 말미암아 한 몸의 관계가 되게 하시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지혜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는 대상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로 말합니다. 이들은 천사를 지칭합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과 권세를 받아 세상을 통치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천사들도 모르는 지혜라면 하나님의 지혜는 누구도 할 수 없는 비밀이 됩니다. 그 비밀을 세상에 나타내고 알게 하는 것이 교회에 주어진 책임인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 지혜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곧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6절)입니다.

 

 

십자가의 도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지극히 작은 자이며 죄인의 괴수이고 만삭 되어 나지 못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곧 복음의 핍박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의 실력이 좋은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 복음의 핍박자로 살아가는 그 모습 그대로 부르셔서 나의 실상을 보게 하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저주 받을 자임을 확인하게 하시고 그러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품고 있는 것이 교회이며 그것은 모든 신자가 세상 조건과 기준을 초월하여 함께 라는 관계로 나타나고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를 은혜로 끌어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의 증거물인 십자가만을 자랑하게 합니다. 나에게는 어떤 공로도 없음을 알게 하시고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자로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 세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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