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전서
2010.10.18 14:28

(18강) 하나님의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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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전 5:19-22http://onlycross.net/videos/1The/1the-051922.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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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설교>

사도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게 살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기를 원하지만, 우리 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기쁨 대신에 근심과 걱정을, 감사 대신에 불만과 불평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도는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현실은 도외시한 채 단지 신자로서의 이상적인 삶을 언급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사도가 꿈꾼 신자의 이상적인 삶이 아니라 사도의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매를 맞고 옥에 갇혀있는 현실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는 권면을 하기도 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초월하여 다른 세계를 살았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사도가 살았던 다른 세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세계입니다. 사도는 자신이 이 세계에 있음을 믿었던 것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형편을 하나님께서 함께하셔서 자기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에게는 매 맞고 옥에 갇힌 것이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기뻐하고 감사할 조건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이라고 여기는 조건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의 결과입니다.

 

 

신자의 믿음은 이렇게 증거됩니다. 기뻐할 수 없는 형편에서 기뻐하게 되고 감사할 수 없는 형편에서 감사하게 되면서,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살아가는 신자의 특이한 믿음의 세계가 증거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이 함께 하셔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시고, 알지 못한 것을 알게 하도록 일하신 덕분입니다.

 

 

19절에 보면 “성령을 소멸치 말며”라고 말합니다. 무엇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일까요? 그것보다도 우리가 성령을 소멸시킬 수 있는 것일까요? 신자에게 함께 하시고 강력한 능력으로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 성령을 우리의 뜻과 힘으로 소멸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성령보다 더 능력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말씀은 신자에게 임재하여 함께 하고 있는 성령을 쫓아낸다거나 사라지게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령은 인간에 의해 쫓겨나는 무능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인간의 뜻을 이뤄주기 위해 함께 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고 계실 뿐입니다. 세상의 형편과 조건을 초월하여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는 믿음의 길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기 위해 성령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방언을 하고 병이 낫는 육신적 체험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성령의 참된 역사를 보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될 뿐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됩니다. 즉 성령을 소멸한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방해한다거나 인간의 의지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성령의 참된 역사를 보지 않고 육신에 유익이 되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간주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합니다. 우리가 불행이라고 여기는 고통과 어려운 삶에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있고 그것이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 것을 깨닫게 하고 보게 하시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 순종하는 것은 항상, 그리고 범사에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봄으로써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육신에 매어서 눈에 보이는 고통과 어려운 현실을 전부로 여기며 근심 걱정과 함께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말씀의 세계에 들어가 있을 때 깨닫게 됩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할 수 없던 일들이 말씀의 세계에 들어갔을 때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고, 그 영혼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로 여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의 일인데도 불구하고 방언을 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이 낫는 육신적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와 성령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한 신자는 영과 육을 분별하게 됩니다. 이 분별력으로 자신의 뜻과 자기 기쁨을 위해 사는 것이야 말로 육에 해당되는 것이고, 나 같은 자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이 어떠한가를 깨닫게 하시고 그 은총과 사랑으로 감사하는 것이 영에 해당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결국 영의 생각을 하는 것은 성령이 오지 않고는 안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만 생각한다면 육신의 문제를 벗어나서는 기뻐할 것이 없습니다. 육신의 문제를 벗어난다면 남는 것은 영의 문제인데 영혼의 문제로 기뻐하거나 근심하지 않습니다. 육신이 병들면 낫기를 원하고 간절히 기도하기도 하지만 영혼이 병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 밖입니다. 영혼이 병들었다고 해도 육신의 문제에 피해될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영의 문제는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영의 문제는 소홀히 하고 육신에만 매어 있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 역시 육신의 문제를 통해서 확인하려고 합니다. 성령이 신자로 하여금 주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하면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 것에 대해서도 무시합니다. 다만 내 일이 잘되고, 건강하고, 가정이 평안하고, 혹 병이 들었다고 해도 기도해서 낫는 체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와 상관이 없는 것이고, 따라서 육의 생각에 매어 사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 됩니다.

 

 

육신의 일로 인해서 기뻐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육신의 문제로 인한 기쁨을 주의 사랑과 은총의 결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육신의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예수님의 사랑과 은총의 현장인 십자가에 있고, 육신의 병이 고침 받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이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구원의 기쁨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20절에서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라고 말하는 것도 육신의 일과 연관이 있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한다고 합니다. 예언을 멸시한다면 그는 필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믿고 경외하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도 실상은 예언을 멸시하는 것으로 가득한 것이 현대 교회입니다.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언을 대하는 신자는 세상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한 심판, 예수님의 오심, 하늘의 생명 등, 세상 일이 아닌 하늘의 일에 마음을 두게 되면 세상에서의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즉 어떤 형편에 처하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증거되는 것이지 육신의 편안함을 누리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육신의 일과 연결하여 말합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 또한 육신의 문제를 중심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을 영과 육을 잘되게 하시는 분으로 말하면서, 구원과 세상에서의 복을 모두 누리게 하는 것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심판도 예수님의 오심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육신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 최대의 관심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재림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예언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21,22절을 보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합니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좋은 것과 악을 분별할 줄 아는 안목입니다. 이 안목이 없다면 인간의 욕망의 시각으로 좋은 것과 악을 분별하게 됩니다.

 

 

하와가 ‘하나님 같이 된다’는 사탄의 말에 미혹되었을 때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을 더 좋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하와에게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주는 좋은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본 순간 하와에게 좋은 것은 자신을 높여주고, 번성하게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것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안목이 가려진 것입니다.

 

 

여러분께 좋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 안에서 생각한다면 마지막 심판 때 우리를 건재내시는 하늘의 은총입니다. 악은 하늘의 은총을 구하기보다는 믿음이 없이 세상의 것을 구하며 살아가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언을 멸시한다면 하늘의 것이 아닌 땅의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고 예언을 멸시하지 않는 신자는 땅의 것이 아닌 하늘에 마음을 두고, 자신을 살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고 살게 됩니다. 기쁨과 감사도 땅의 것이 아닌 하나님이 베풀어진 사랑과 은총에서 찾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신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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