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3.17 10:06

(53강) 이웃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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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0:25-37http://onlycross.net/videos/nuk/nuk-102537.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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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설교>

 

◉ 자비를 실천할 수 있는가 ◉

 

어떤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하는 의도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은 이웃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다시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로 이어집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 치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유년부나 학생부 아이들이 이 이야기를 대본으로 하여 연극을 하지 않은 교회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유명한 내용인 반면에 이 이야기에 대한 이해 또한 그 방향이 크게 잘못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37절을 보면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대개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를 실천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결국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에게 자비 베푸는 일을 실천하라는 도덕적 교훈으로 끝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교훈적 내용에 은혜를 받았다 하기도 하고,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푸는 일에 실천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러한 도덕적 교훈을 주기 위해 이 이야기를 하셨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과연 우리가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를 베풀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은 누가 봐도 본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실천의 능력은 없습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에게 자비를 실천할 능력이 없다는 말이 납득이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강도 만난 자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에는 강도 만난 자가 유대인이라는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30절에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 가다가”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의 관계가 어떠했는가는 잘 아실 것입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짐승처럼 취급을 했고, 사마리아 사람 역시 유대인에 대한 감정이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보면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유대인에게 자비를 베풀고 도왔다는 것은 인간적 감정과 관계를 모두 초월한 채 다만 강도 만난 그 사람의 처지를 불쌍히 여겼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러한 실천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나와 관계가 좋은 사람으로 선을 긋습니다. 관계가 좋지 않고 미워하는 감정이 있는 사람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이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실천이 우리에게는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자비를 실천하자는 도덕적 교훈으로 결론을 맺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율법의 틀 ◉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하신 것은 어떤 율법 교사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그 동기입니다. 따라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는 이 질문과 연결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질문한 율법 교사는 진심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실천적 문제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25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한 의도였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했다는 것은 율법 교사는 이미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예수께 그 같은 질문을 했음을 의미합니다. 평소 율법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던 예수라는 사람이 또 다시 율법을 무시하는 답을 하면 그것을 빌미 삼아 곤란에 빠뜨리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영생의 길은 오직 율법 안에 있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영생이 이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구든 율법을 무시하고 다른 것을 영생의 길로 제시한다면 유대 사회에서는 이단으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율법 교사가 바로 이것을 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라고 반문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면 무엇이라고 답하겠습니까? 신자라면 누구나 ‘주 예수를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라고 답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그렇게 답하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이것은 율법 교사의 생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보면 율법 교사는 영생을 자신의 실천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가치 있는 실천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 교사만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공통된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율법 교사에게 ‘나를 믿으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요? 예수 자신을 믿는 것을 율법을 실천하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예수님 말을 트집 잡고 시비를 걸게 될 것입니다. 즉 예수를 시험하고자 한 의도가 성공된 것입니다.

 

 

율법의 실천을 중요하게 여기는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은 율법이 무엇이라고 말하는지에 대해 반문하시고 율법 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절)라고 답합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어느 율법사가 역시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어느 계명이 큰지 물은 일이 있는데 그때 예수님도 율법 교사와 같은 답을 하셨습니다. 이것을 보면 율법 교사의 답은 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율법에는 수많은 규례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규례들 속에서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다른 실천의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규례를 영생을 위한 실천적 규례로 언급한다는 것은 적어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최고의 가치 있는 실천의 행위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모범적인 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고 말씀합니다.

 

◉ 이웃에 대한 고정 관념 ◉

 

예수님의 이 같은 말씀에 율법 교사는 또 다시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절)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의 의도는 자신을 옳게 보이기 위해서였습니다. 사실 율법 교사에게 이 같은 질문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가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율법 교사는 이 질문을 통해서 자신이 영생에 대해 관심이 있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의지가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괜찮은 인간임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이웃이 누군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신 것이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비유를 말씀하시고 예수님은 율법 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라고 묻고 율법 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답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은 아마 자존심이 상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유대인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일을 주관하고 수종 드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피하여 갔고, 유대인들이 더러운 존재로 여기는 사마리아 사람이 도와주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비가 없는 매정한 사람이 되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 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싫어서 ‘자비를 베푼 자’라고 답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러한 율법 교사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율법 교사는 예수님께 질문 하는 그 때부터 이미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율법 교사가 비록 영생의 문제로 질문을 했지만 그는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에 대해 알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강했습니다. 그래서 율법 교사가 말한 율법대로 행하라는 말씀을 들었으면서도 돌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이웃의 범위를 묻는 것입니다. 이웃과 이웃이 아닌 사람의 한계를 어떻게 확정지을 수 있는지 말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교사,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이웃에 대한 개념입니다.

 

 

이웃 사랑을 말할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의 대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보다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도와주는 것을 이웃 사랑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의 실천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율법 교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율법으로 말했을 때 예수님은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이웃 사랑이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가서 도와주는 그런 수준이겠냐는 것입니다.

 

 

영생은 우리의 행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행하면 사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방식으로 영생을 얻은 자는 없습니다. 이 말은 누구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규례를 행할 수가 없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 들여서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규범으로 자리하게 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율법으로 작용하게 될 뿐입니다. 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짐을 지우는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율법 교사에게 이웃은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행한 자기 동족이었습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이웃과 원수를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모든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서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씀합니다. 즉 이웃의 범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불쌍히 여기는 마음 ◉

 

사마리아 사람에게 강도만난 사람은 자신을 더러운 존재로 여기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일반적인 이웃에 대한 개념으로 대한다면 도와주지 않고 지나쳐도 무리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 오직 강도 만난 그 처지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를 불쌍히 여깁니다. 결국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는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겼기에 자연히 행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자를 피해 간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사실 제사장, 레위인과 강도 만난 사람은 같은 동족이기에 일반적인 이웃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서로 이웃 관계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강도 만난 사람을 피한 것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 다가가면 자신이 귀찮아 질 수 있다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이웃은 인간관계에 의해 고정된 어떤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같은 동족이고 같은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라고 해서 나의 이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곧 율법 교사와 같은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비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출발합니다. 그렇게 보면 ‘이를 행하라’는 말씀은 단지 불쌍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를 도와주라는 뜻이 아니라 누구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자비를 베푸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불쌍함은 그가 처한 형편과 처지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거의 죽게 된 것처럼, 인간의 실상이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죽어야 할 처지에 있다는 것이 불쌍함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불쌍히 여기고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을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신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불쌍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이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자비를 알 수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웃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불쌍함에서 예수님의 자비를 알게 된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자가 이웃이 되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지 마시고 과연 죽음에 처한 나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마음을 아는 가를 먼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의 자비하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음을 감사하는 그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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