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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8 09:36

(127강) 부활의 예수님과 제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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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36-43http://onlycross.net/videos/nuk/nuk-24364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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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37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설교>

 

부활하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있던 제자들에게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런데 그들 역시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영, 즉 유령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여 놀라며 무서워합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하시고, 만져보라고까지 하시면서 영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는 실재적 존재임을 확인시켜주십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까지 제자들에게 부활을 확인시키시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본문을 보면서 부활의 상태에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 육체로 계실 때와 동일하게 만질 수 있는 살과 뼈의 상태인가에 궁금증을 가지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42,43절에서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고 한 내용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이 부활 후에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하면서 장차 신자도 음식을 먹고 마실 수 있는 상태로 부활 하는가에 관심을 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관심들은 모두 본문의 내용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다고 해도 답을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활의 몸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활한 후에도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음식을 먹든 먹지 않든 신자에게는 부활 자체가 영광이기 때문에 영광에 마음을 집중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어떤 상태인가를 설명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습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몸을 보이시고 만져보라고 하시면서 까지 확인시키고자 하신 것도 단지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한 의도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부활의 몸을 만져보라고 하시면서 까지 확인시켜주시는 것에는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부활하시기 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흔히 기대하는 것처럼 부활 전과 전혀 다른 상태, 즉 광채가 나는 것과 같은 영광된 몸으로 나타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라고 말한 것처럼 흠모할만한 모양도 아름다움도 없는 몸으로 오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그 몸 그대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 역시 죽을 때의 몸의 상태 그대로 부활한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한 것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다른 의도로 갖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 다른 점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몸의 상태에 관심을 둡니다. 그리고 지금의 몸보다는 훨씬 더 나은 상태로 부활할 것을 기대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현재 자기 몸에 대한 불만을 부활로나마 해소해보고자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현재의 자기 몸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좀 더 잘 생겼으면, 좀 더 키가 컸으면 하고 많은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몸이 아닌 것에 불만이 있습니다.

 

 

몸에 대한 불만을 성형 수술이라는 것으로 해결해보려고도 하지만 이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답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결국 자기 몸에 대한 불만을 부활의 몸은 다를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심리적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남들보다 못한 몸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시키기 위해 다른 장점 같은 것으로 부족함을 대치하여 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이고 부활의 몸 또한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늙어서 죽으면 늙은 몸 그대로 부활하는지, 장애인은 장애인의 몸 그대로 부활하는지에 궁금증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런 우리의 생각에 전혀 동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은 현재에 대한 보상이나 보복과는 무관함을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몸을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만지라고 까지 하시면서 확인시켜주고 계시지만 제자들이 결국 확인하게 되는 부활의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의 예수님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잡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즉 배가 고파서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라고 하시고 제자들이 준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신 것이 아니라 죽으시기 전과 전혀 다르지 않으심을 보여주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 믿게 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예전의 환상에 빠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에 대해 보복하시거나, 제자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해방을 위한 메시아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신앙에서 크게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는 보상입니다. 현재의 고난과, 희생과, 헌신과, 봉사와, 섬김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으며 그 보상을 현재의 복과 미래에 주어질 천국에서의 상의 차이, 그리고 부활하여 영광을 누리는 것 등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이 십자가의 고난에 대한 보상일까요? 보상적 의미의 부활이라면 고난의 때와는 다른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고난을 받는다고 해도 참으면 이 같은 영광된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에서는 보상적 의미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수님의 부활은 고난 없이는 맺어질 수 없는 열매의 의미로 증거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할 모든 신자는 고난의 길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의 모든 현실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자기 영광을 생각하게 되면 현실에서 하나님의 선물을 볼 수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동행하셨지만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 부활의 예수님인 것을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신자가 존재 이유를 자기 영광을 위한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모든 현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에 눈이 가리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라는 것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이것이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그럴 때 모든 현실이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방향으로 인도 받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나와 같은 존재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로 부름 받고 쓰임 받는 것 자체가 영광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모든 현실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선물이라는 사실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인도 받는 길이 고난이라도 해도 그 열매는 영광으로 맺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부활의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것입니다.

 

 

신자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신자의 이 길이 하나님에 의해서 미리 정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고 존재할 때부터 이미 길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도 아니고 의지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나의 길은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정해 있다’는 사실이 포함된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 가치관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세상이 알 수 있고 환호하게 되는 영광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기대했던 영광이 세상의 환호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그러한 영광으로 보상받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그 모든 기대가 산산조각이 났기에 실망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애당초 하나님이 말씀은 영광은 전혀 달랐습니다.

 

 

행 3:13절에 보면 베드로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지만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입으신 영화입니다. 십자가에 죽음과 부활이 영화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길로 가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입으신 영화로 인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입으신 영화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보여주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은 모든 말씀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임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이 입으신 영화입니다. 죽은 몸이 다시 살았으니 영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놀랄 영광의 몸이 아니라 죽을 때의 몸 그대로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서 확인해야 하는 것은 영광은 높은 자리에 올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위장한 자기 영광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자를 그러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심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48절에 보면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모든 일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말합니다. 이 일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고 그 길로 가게 되는 것이 사도입니다. 하지만 그 길에서 사도들이 만나게 되는 것은 세상 영광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입니다.

 

 

사도들은 고난과 죽음에서도 예수님이 가신 길로 가게 됨으로 인해서 세상과 다른 길을 가고 있음이 증거되는 것이고 이것이 사도들이 입은 영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인도 받는 영화의 길도 바로 이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물론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과 제자들이 부활을 믿게 되었지만 그들 스스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대한 세상의 반응입니다.

 

 

요 12:38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사야에게만 국한 된 내용이 아닙니다. 모든 선지자의 시대에 나타난 동일한 현상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지 않음’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믿지 못한 것을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사 12:40)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심으로 그들 스스로 믿지 못하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보게 되고 깨닫게 되고 마음을 돌이키게 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눈이 가리어져 알아보지 못한 것이나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을 직접 보고도 무서워하고 의심할 뿐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이야기도 믿음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믿는다’고 자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알고 있는 것을 믿고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알고 있는 생각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부인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때문에 유대교 신앙의 전문가들의 미움과 분노를 사고 결국 붙들려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제자들도 그리스도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 의해 보냄 받으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들의 전통과 헛된 생각과 욕망에 의해서 만들어진 허상이고 우상이었을 뿐입니다.

 

 

제자들이 알고 있던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 오시고 일하시는 메시아였을 뿐입니다. 이 생각이 무너졌을 때 비로소 제자들은 세상의 죄를 지고 가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하고 부활하셔야 했는지, 그 내막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증인으로 남은 인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알게 된 신자가 추구해야 할 남은 삶의 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배워야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무력한 우리를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 밖에 없음을 알고, 우리를 생명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이 있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우리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높이고 찬송하는 것에 그 뜻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한 것이 없으면 믿음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자기 행함을 동원하여 하나님께 인정받는 가치 있는 믿음으로 포장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다고 유혹했습니다. 유혹에 빠진 하와에게 선악과나무는 예전과는 달리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로 보였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이 탐스럽게 다가옵니다. 행함 역시 자신을 가치 있는 신자로 만들어 줄 도구로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다고 해서 세상이 알아주는 존재로 부각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가신 고난의 길이 참된 생명의 길이었음을 알게 되고 나 또한 그 길로 인도 받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이 예수님을 만난 신자의 변화입니다. 눈이 밝아져서 진리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선물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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