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4.10.05 10:05

(128강) 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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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24:44-49http://onlycross.net/videos/nuk/nuk-24444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설교>

 

◉ 어려운 진리 ◉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내용이 어려운 탓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지금 우리에게 구축되어 있는 사고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리에 대한 당연한 현상입니다. 진리는 비밀입니다. 우리의 사고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감추어진 비밀과 같은 것입니다.

 

왜 우리의 사고로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담의 범죄에 있습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은 아담의 범죄에 속해 있다는 것을 많이 들으셨을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에 속해 있는 우리의 사고는 늘 내 중심으로 뭉쳐 있고 그것이 곧 부패한 인간의 속성이기에 그 속성으로는 하나님 중심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 증거하는 진리를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받아들여지던가요? 우리의 사고 자체가 부패한 속성을 근원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신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누군가의 간섭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사고로는 언제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아주 먼 과거의 사건에 매여서 나 또한 그 당시의 범죄자와 같은 죄에 속해있다는 내용이 이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십자가의 구원도 이해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간섭이 없는 상태에서 기존의 사고로 아담의 범죄에 대해 듣게 되면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진리는 누군가의 간섭이 없이는 깨달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여러분의 경험으로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진리는 완전하고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소위 진리를 전한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의 말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작금의 기독교는 소위 진리를 안다는 자들의 쓰레기 같은 진리 아닌 진리로 인해 혼란만 가중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기독교인들은 무엇이 참된 진리인가를 분별해야 하는 상황에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진리로 인한 고민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이상하게 고민들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마음에 맞으면 무조건 진리로 간주해 버리는 습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진리에 관심을 두고 진리를 찾아 그 길로만 가기를 원하는 것보다 내 마음에 맞는 말, 내 마음에 맞는 교회를 찾아 정착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진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새롭게 알아야 할 필요성은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교회만 마음에 맞으면 된다는 생각과 함께 교회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 태도이며 또 한편으로는 진리에 대한 자신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과연 진리인가?’에 대한 성찰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을 읽는 사람들의 생각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어려운 내용입니까? 어렵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이야기, 그리고 본문의 이야기는 여러분께 이미 깊이 입력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증인에 대한 오해 ◉

 

 

그렇다면 이 내용들이 무엇을 전하며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후에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에게 선교의 지상명령을 선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을 사실적으로 전하는 사명을 가르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까? 특히 48절의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는 말씀은 여러분께 그러한 생각에 머물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그런 가르침을 기본적으로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진리를 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의 의미가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선교에만 힘쓰면 된다고 여긴다면 여러분께 말씀의 세계, 진리의 세계는 닫혀지고 말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문제의 개념을 이해하고 풀어가는 것보다는 단지 답을 외워 맞히는 것에 집중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버려야 할 태도 중에 하나는 진리에 대한 자신감입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목사 역시 경계해야 할 태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결국 설교는 성경 지식을 전달하는 학습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놀라운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해 제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누구도 부활을 예상하지 못하고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절망과 슬픔으로만 가득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부활을 확인시켜 주지 않으셨다면 부활은 아무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단지 시신이 사라진 것에 대한 의견만 분분했을 것입니다.

 

 

우리라고 해서 제자들과 다를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십자가와 부활을 알고 있고 진리를 안다고 해도 부활의 예수님이 나타난다면 알아보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오히려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을 또 다시 매달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이 세대에서도 예수를 살해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고 하나님만을 지극히 신뢰하는 유대인이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살해한 것처럼, 오직 성경을 외치는 현대 교회가 진리요 길이요 생명으로 오신 예수를 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이 교회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림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참된 복음을 외면하는 교회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환영하는 일은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이런 우리가 무엇을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또 무엇을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는 말씀이 제자들에게 확인되어진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임을 증언하라는 뜻이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이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부여된 사명인 것일까요?

 

 

우리는 증인이라는 말에 큰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무 단편적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도와 선교에 힘쓰면서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 곧 증인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증인의 할 일이라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한 즉시 증인의 일을 하기 위해 흩어지면 됩니다. 이미 부활을 확인했으니 그 사실을 전파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복음이고 진리일까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 사실 자체가 우리를 생명으로 이끄는 진리이고 복음의 내용인가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것 때문에 천국가지는 않습니다. 또한 부활의 사실성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우리는 증인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교에 힘쓰며 예수를 전해야 한다는 것에 이견이 있을 수는 없지만 무엇이 증인인가 하는 것은 제대로 알아야 하고 증인이 증언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바르게 알아야 할 필요성은 분명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 아닌 것을 복음이라고 전하며 사람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일을 돕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현대 교회가 무작정 선교를 강조하고 성과에만 매달리는 것은 본질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 증인, 성령, 회개 ◉

 

 

44절에 보면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이라면 구약 성경 전부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 성경 전부가 예수님을 가리켜 기록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나 개인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을 못 박고 시작해야 합니다. 즉 성경에는 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뜻을 이루는 길과 방법이 성경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애당초 성경을 자기중심으로 왜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이 우리였고 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구약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우리 역시도 말씀이 우리의 복과 평안과 형통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이 알게 하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예수님만 잘 믿으면 현실에서 무슨 문제를 만나도 예수님이 해결해 주시고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우리 역시 환경으로 인해 힘들어 하고 고달플 수밖에 없지만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죽음이 끝이 아닌 부활의 세계로 인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현실에서도 예수님을 자랑하게 되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신앙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45-47절에서는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시는 그 사건의 중심에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을 살해한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살해한 그 현장, 그 사람으로부터 회개가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개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된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음과 상관없는 모든 민족들까지 자신이 예수님을 살해했음을 깨닫게 하고 회개케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고 이 일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것이 제자라는 것입니다.

 

 

행 1:8절에 보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씀이 우리에게 선교에 대한 사명을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거나 미미한 곳으로 가서 선교에 힘쓰거나 그 일을 하는 선교사를 돕는 것을 증인의 사명을 실천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이 말을 하는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또한 참된 의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행 1:8절은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6절)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왜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으로 연결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본문의 증인의 의미 또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이미 상식처럼 굳어져 있는 내용에 매몰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한 질문을 던진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고통이 끝나고 영광이 회복되는 때에 관심을 두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를 믿은 믿음의 승리가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드러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눅 24:21절에서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로 알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그러한 승리의 세계를 이뤄주기보다는 예수님의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49절의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는 말씀과도 연결됩니다.

 

 

이처럼 증인은 성령이 임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고는 증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더 크고 위대한 선교의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일까요? 그러나 성령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능과 역할을 위해 오시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오심은 47절에서 언급하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부활의 사건이 있을 때까지 제자들에게서 나타났던 것은 자기사랑뿐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심을 둔 것도,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로 알았던 모든 것도 자기사랑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해서 자기 한 몸 영광된 존재가 되고 원하는 것을 얻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증인이 되게 하는 것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증인이 되게 하시기 위해 성령을 보내신 것이고 그들에게 죄 사함 받게 하는 사건이 있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증인되게 하셔서 증언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예수님을 살해한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고 그 죄를 용서하시고 생명으로 인도하기위해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어떤 인간도 예수님이 아닌 자신의 의로움이나 인간적 조건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하는 것이 증인으로 부름 받은 제자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에 담겨 있는 참된 의미입니다.

 

 

다 아는 당연한 내용으로 들리십니까? 뻔한 결론을 위해 빙빙 둘러 왔다고 생각되십니까? 하지만 지금의 기독교의 현실은 제자들의 실상이었던 ‘자기 사랑’이라는 죄 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죄 사함의 회개를 알 수 있겠습니까?

 

 

죄 사함의 회개와 용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이루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증인이 무엇인가를 안다면 자기 사랑에 붙들린 나 자신이 예수님을 살해한 악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한 내가 어떻게 죄에서 해방되어 생명으로 인도 되었는지 그 모든 일의 증인으로 부름 받은 것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증언할 것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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