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09.02 16:07

(18강) 사람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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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설교>

신자는 자신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시각으로 직시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 세상을 제대로 인식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시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기독교 자체가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조차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의가 말로만 존재할 뿐 믿음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도 바울이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을 때와 예수님을 알게 된 바울로 존재했을 때의 다른 점이라면 인식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인간의 의의 시각으로 바라보던 것이 하나님의 의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의 시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인간의 의의 시각에서 말하는 것과 하나님의 의의 시각에서 하는 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행 22:3절에 보면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출신 지역과 성장 환경, 출신 학교, 그리고 신앙 열심이 자랑이 되고 우월의 조건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시각이었고 의의 조건이었기에 바울도 인간의 시각으로 존재했을 때는 그 같은 자기 의를 위해 열심을 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바울이 복음의 세계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의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게 되었을 때는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9)고 말 합니다.

 

 

이것을 보면 바울은 인간의 의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시각으로 사고의 중심과 가치가 완전히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랑의 주체, 이유, 조건 등의 모든 것이 전환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에게는 기독교인다운 의를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이 부담감은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의를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평생 벗어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돌아오는 것은 의를 보여야 한다는 부담과 의를 보이지 못한다는 죄책감뿐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를 보임으로써 누리는 만족과 행복과 심리적 안심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현대 사회는 소유와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갑니다. 기독교인 또한 이러한 세상의 흐름 속에 함께 떠밀러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가 과연 오직 의를 실천하는 믿음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사회 속에서 저마다 자기 생존을 위해 살아갑니다. 각기 다른 일을 하며 살아가지만 공통적인 것은 만나는 세상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존의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에 자리한 진리이고 또 그러한 신자로 살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그러한 마음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현실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신자다운 것일까요?

 

 

다시 말하지만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단지 기독교인이란 종교인으로 대하면서 ‘기독교인이니까 이렇게 해야지’라는 요구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상의 요구를 따라 신자답게 살기 위해 애를 씁니까? 설사 생존의 문제에 손해가 된다 해도 신자다움을 보이는 일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걸어 두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생존 문제에 대해서는 약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것이 인간의 현실이고 우리 자신의 실상이고 약함인 것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를 알고 우리 안에 믿음이 있고 성령을 받은 신자라면 그 믿음과 성령 받음이 어떻게 드러나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딤후 3:5절에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말합니다. 대개는 이 말의 의미를 ‘복음을 믿는다면 그 복음은 능력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이해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5-17)는 구절에 의해서 더욱 단단히 굳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 안에 믿음이 있고 성령을 받았다면 그 믿음과 성령은 행함을 통해서 증거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붙들려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에 대한 이러한 시각에서 3절의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는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고후 7:1절을 보면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에서처럼 사도 바울은 거룩함을 이루는 것과 육과 영의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을 함께 말합니다. 육과 영을 깨끗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육과 영이 더러운 세상 속에서 자신, 즉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는 과연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였을까요? 사도 바울이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한 고린도 교회를 가리켜 시기와 분쟁이 있고 육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여러분은 거룩하여진 성도에게서는 더러운 것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더러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말한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여러 문제들이 신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이 모든 의문은 ‘신자가 비록 거룩하여진 성도라 할지라도 죄인이다. 따라서 더러운 모습이 나올 수밖에 없지만 신자이기 때문에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힘쓰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로 해결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이 인간의 의의 시각에서는 먹힐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의의 시각에서는 결코 먹힐 수 없는 말일 뿐입니다.

 

 

바울이 말한 사람을 따라 행한 일이 시기와 분쟁이고 육신에 속한 자의 더러운 일이라면 비록 신자라 해도 더러운 일에서 자신을 깨끗케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있는 곳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이 시기와 분쟁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한다는 말의 의미는 시기와 분쟁이 있는 세상 사람들처럼 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신자에게 있고 성령으로 거룩하여지면 시기와 분쟁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론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육과 영의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모순처럼 들리는 성경과 성경 사이에서 신자의 생각과 마음이 갈팡질팡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예수님 앞에서 구원 받은 자로 살기 위해 거룩하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저렇게 사는 것이 신지다운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신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믿음이 뭔가 가벼워 보이고 삶 또한 믿음에서 멀어진 것처럼 생각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행함에만 초점을 두는 것일 뿐입니다. 즉 인간의 의의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겔36:26-27절에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영으로 새롭게 하신 새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부드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율례를 행하게 하시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율례를 행하되 영을 받지 못한 옛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있고, 새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철저한 성전 신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기 위해 힘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새 마음으로 율례를 행하게 되면 행함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산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함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은 하나님의 의로 오신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아니면 구원과는 무관한 자일뿐임을 확인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의 시각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의의 시각 자체가 성령을 받음으로 가능하다는 뜻이 됩니다.

 

 

행함 자체가 더러운 행함이 있고 깨끗한 행함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행함은 그저 행함일 뿐입니다. 가령 구제를 행했다고 했을 때 그것을 더러운 구제와 깨끗한 구제로 나눌 수 있을까요? 과연 어떻게 해야 더러운 구제가 되고 깨끗한 구제로 나눠질까요? 구제는 그냥 구제입니다. 그런데 더러운 구제가 있고 깨끗한 구제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구제가 시기와 분쟁으로 이어지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구제를 수단으로 해서 자신의 신자 됨을 보이고자 할 때 그 구제는 시기와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구제라는 행함에서 자신의 신자 됨을 확인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구제라는 행함에 특별한 가치를 두었다는 뜻이 되고, 구제를 행할수록 신자다움의 가치는 더욱 향상 된다고 생각이 시기와 분쟁을 낳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러운 구제입니다. 구제의 행위가 더럽다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수단으로 해서 자신의 신자 됨을 확인하고자 하고, 좀 더 가치 있는 신자로 존재하고자 하는 그 속성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육신에 속하여 사는 것이고 시기와 분쟁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면 깨끗함은 무엇일까요? 겔 36:25절에 보면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히 10:21-22절에서는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맑은 물은 생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더러운 것에서 정결하게 되고 몸 또한 씻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맑은 물로 몸이 씻음 받았다는 것을 거룩한 신자에게서는 거룩한 행동이 나와야 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깨끗함은 예수님의 피의 은혜 안에서만 통용될 수 있고 성립되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예수 밖에 있기에 육과 영 자체가 더럽습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에 머무는 것이 전부입니다. 거룩한 어떤 행함을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행함이 있든 구원의 의는 그리스도이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거룩한 세계에 있게 하신 은혜의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존재 가치가 아니라 존재 이유를 지켜야 하며, 거룩한 신자로 존재하게 하신 피의 공로의 가치와 존귀함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고린도 교회는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잊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보는 것이고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성도로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간에 대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너희를 거룩한 신자로 존재하게 한 그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켜야 할 그것이 곧 십자가입니다.

 

 

신자가 사람을 따라 행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가치를 위해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상이 행하는 방향이 자신의 가치 향상으로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볼로’‘나는 바울’이라고 하는 것도 표면적으로는 아볼로나 바울을 높이는 것이지만 그 속은 자신의 가치 향상으로 행해 있습니다. 이것이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믿음이 있고 성령이 있다면 그 믿음과 성령은 오직 그리스도라는 방향으로만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여러분의 행함으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육신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신자는 사람이 아닌 성령을 따라 행하는 거룩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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