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5.26 09:37

(62강) 외식을 주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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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2:1-5http://onlycross.net/videos/nuk/nuk-120105.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설교>

 

◉ 수만 명의 무리들 ◉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의 말을 외치는 사이에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고 말합니다. 수만 명의 무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오직 예수님 한분 때문에 모인 사람들일 것입니다.

 

 

물론 그들 가운데는 바리새인이나 율법 교사들처럼 예수님의 말을 책잡기 위해 노리는 자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거나,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목격하고 따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여든 수만 명의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수만 명 무리의 모임을 위해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지 않으신 것은 물론이고 그 무리들을 가르쳐서 좀 더 많은 무리를 모으시고자 하는 것도 없습니다.

 

 

만약 저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수만 명의 무리가 모였다면 저는 그 무리를 보면서 나의 설교 능력에 뿌듯한 마음을 가졌을 것입니다. 많은 무리가 예배드릴 수 있는 장소를 구하는 일에 관심을 두었을 것이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모여든 수만 명의 무리는 관심에 두지 않으신 듯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을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는 수만 명의 무리가 관심의 대상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 모여든 무리의 수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예수님과는 너무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생각하는 바가 다르고, 나아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를 마치 예수님만 믿고 따르는 것처럼 여깁니다.

 

 

예수님과는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교회를 나오고 예배를 드리니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모이는 무리의 수에 관심을 두면서도 천국을 소망한다고 말합니다. 천국을 소망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천국 외에 다른 것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천국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세상의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영광된 나라가 천국이고, 세상은 심판이 임하여 사라지지만 천국은 영원합니다. 그 천국을 마음에 두고 소망을 하는데 그런 마음에 파고들어 관심의 대상으로 자리할 세상의 것이 있겠습니까?

 

 

무리의 수에 관심을 두는 것은 많은 것이 힘이 되는 세상 가치관에 따른 것입니다. 수만 명이 아니라 수십만 명이 예수님께로 모인다고 해서 예수님이 관심이나 둘까요? 제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인다고 해도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 사람의 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은 예수님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인데, 그 뜻을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 6:39)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찾는 것이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으고 그 사람들을 예수님을 추종하는 세력으로 만드는 일은 애당초 예수님과는 상관없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하나는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찾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를 향해서 ‘화있을진저’라고 저주를 선언하시는 것도 단지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사람을 찾고자 하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과 이어지는 모든 말씀들도 자기 사람을 찾고자 하는 말씀이며,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는 자기 사람은 말씀에 의해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되면서 ‘나야 말로 천국에는 가당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용서의 은혜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를 향해서 ‘화 있을진저’라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마음으로 자신을 보게 됨으로 인해서 스스로 자신을 ‘화 있을진저’에 해당되는 존재로 여기고 예수님께 나오게 되는 것이 예수님이 찾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들 만이 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사람의 수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수에 관심을 두고 세상의 것을 구하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이라고 할 수 없고 그런 마음으로는 천국을 소망한다고 해도 정작 그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세상이라고 하는 것이 솔직한 고백일 것입니다.

 

◉ 바리새인의 외식 ◉

 

이처럼 마음에는 세상을 두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고 천국을 소망한다 하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 때문에 구원 받는다고 여기는 것이야 말로 위선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위선의 대표자로 바리새인을 내세워 제자들에게 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외식은 겉만 보기 좋게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속이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속은 타인에게 노출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겉을 보기 좋게 꾸면서 타인에게 좋은 평판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을 외식하는 자로 말씀하는 것은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11:39)는 말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한 자신의 속은 보지를 않고 겉만 깨끗이 하여 타인에게 그럴듯한 존재로 보이고자 했었고 그것을 외식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외식을 왜 누룩으로 표현 하셨을까요? 그것은 외식과 누룩이 서로 같은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누룩은 발효제로서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용도로 사용합니다. 이처럼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의 속성을 외식의 속성과 공통적인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외식이 자신을 돋보이고 싶은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기에 밀가루 반죽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과 같은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외식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여든 수만 명의 무리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은 은석교회에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들면 어떤 마음이 될 것 같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목사는 어깨에 힘이 들어가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수만 명의 무리가 모인다는 것 때문에 은석교회가 대단한 교회가 된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늘 힘이 되는 것에 마음이 끌리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자들도 모여든 수만 명의 무리를 보면서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요? 수만 명의 무리가 예수님 때문에 모여들었다면 예수님의 공식 제자인 자신들은 수만 명의 무리들 속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바리새인의 외식으로 말씀하시면서 주의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과시욕이라는 것이 있고, 과시욕으로 인해서 기회만 되면 자신을 부풀려 대단한 존재로 부각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외식이며 제자들 또한 외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주의하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오늘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교회 규모에 관심을 두는 것이 외식이며 사람의 수에 관심을 두는 것도 외식입니다. 타인을 의식하며 기도하는 것도 외식이며, 도덕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인품을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도 외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외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외식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되면 ‘내가 바로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인정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바로 자신을 제대로 보는 자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속이 아니라 겉만 바라봤기 때문에 스스로를 깨끗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자기 속을 보지 않는 것은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깨끗하다는 착각에 빠지는 외식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속을 제대로만 보게 된다면 겉 행동이 어떻든 자신을 깨끗하다 하지 않습니다.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의 목사라도 자기를 제대로 본다면 사람 수 때문에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람은 속을 보기보다는 늘 겉에 신경을 쓰며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속을 보면서 외적인 조건이 어떻든 스스로를 저주가 마땅한 자로 여기며 예수님의 용서에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그 마음이 새롭게 된 것이며 이들이 예수님이 찾고자 하시는 천국 백성에 해당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2절을 보면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이 말씀이 본문과는 전혀 다른 문맥, 다른 의미로 말씀되고 있습니다. 마태에서는 열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나가서 선포할 것을 가르치시면서 제자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주어집니다.

 

 

하지만 누가는 바리새인의 외식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 때가 오게 된다는 경고로 주어집니다. 더러운 것을 감추고 깨끗한 것처럼 행하지만 결국 감추어둔 모든 더러움이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3절의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는 말씀도 2절의 의미와 다르지 않습니다. 제아무리 은밀하게 말한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는 감추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심판 때에는 사람이 감추고자 한 모든 더러움과 악이 드러나게 되고, 하나님은 그 더러움을 기준으로 하여 심판하실 것입니다. 더러운 자는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에 결국 멸망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 ◉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외식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까? 말씀한 대로 인간은 외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자신에게 집착한 채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누구도 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너희 자신이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는 자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 속에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라는 말씀처럼 우리 속 깊숙이 감추어 두고 아무도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지 못한다고 여기며 깨끗한 것처럼 행세하지만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이 말씀으로 모든 것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는 말씀과 같이 장차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은 벌거벗은 것처럼 그 모든 수치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 수치를 미리 드러내시고 보게 하시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말씀으로 인해 자신의 수치와 더러움을 보면서 이 모든 것을 가려주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마지막 때에 낱낱이 드러날 수치와 더러움을 미리 드러내고 보게 하기 위해 말씀이 있는 것이고, 신자는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수치와 더러움을 보면서 자신이 저주에 속한 자며 심판이 마땅한 자임을 알고 주를 바라보는 이것이 예수님이 찾으시는 사람, 즉 천국 백성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외식을 주의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5절에 보면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을 권세가 있으신 분이고, 이 권세는 세상의 마지막 때가 되면 가차 없이 행해질 것입니다. 영원한 멸망에 처해지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지금 내가 어떤 사람으로 부풀려지고 보여지는가는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으로 보인다 해도 결국은 지옥으로 던져짐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면서 마지막 때에 드러나게 될 더러움과 수치를 보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에 마음을 두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은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 마땅합니다’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 때 우리를 지옥에 던져 넣으실 권세가 있으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자기 속의 실체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속을 보게 됨으로 예수님만을 크신 분으로 바라보게 되는 그가 천국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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