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06.30 09:55

(66강) 나의 보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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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2:32-34http://onlycross.net/videos/nuk/nuk-123234.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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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설교>

 

◉ 자녀에게 주고자 하신 것 ◉

 

신자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이십니다. 이는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계에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신자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새와 백합화를 기르시고 입히시는 것처럼 자녀를 돌보시며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아시고 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비록 악한 자일지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하물며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분명 좋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31절에 보면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시면서 이어서 32절에서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자녀에게 주시고자 하신 좋은 것은 그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먹을 것, 입을 것의 문제 역시 하나님이 책임지시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주고자 하신 좋은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신자가 먹을 것, 입을 것으로 풍성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없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도 아님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따라서 신자가 먹을 것, 입을 것으로 부요해지는 삶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기도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의 기도는 하나님이 자녀에게 주고자 하신 좋은 것을 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받을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신자가 하나님이 주고자 하신 것을 구함으로 인해서 신자의 마음이 어디로 향해 있는가를 알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즉 신자는 자신의 기도를 통해서 자신이 진심으로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29절)고 말씀하시는 것도 무엇을 먹고 마시느냐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 인생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그 가치가 평가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기준에서는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는가의 문제로 인생의 가치와 성공 여부가 평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무엇을 먹고 마시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고 죽음 이후의 세계 또한 무엇을 먹고 마셨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사람이 관심 두어야 할 문제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아님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 그 나라 ◉

 

그 나라는 신자가 영원히 거할 생명의 나라입니다. 세상은 죄로 가득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전도서의 솔로몬의 말처럼 바람을 잡으려 하는 것처럼 헛된 일들이지만 그 나라만큼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그 나라에 속하게 됨으로 세상에 없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이기 때문에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아는 것이 당연하고 따라서 아버지가 주고자 하시는 그 나라를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그 나라를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로 바라보게 된 신자에게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기뻐하심을 따라 그 나라를 구하게 된다면 그것이 곧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부요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그 나라의 존귀함을 알고 진심으로 그 나라를 구하게 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의 어리석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늘 소유에 민감합니다. 적은 것보다 많은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항상 소유가 많아지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소유가 많을수록 사람이라는 무리 속에서 힘 있는 자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인수가 많기를 원하는 것도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교인이 곧 힘이 되기 때문에 적은 교인 수에 실망하고 항상 교인 수가 증가되는 부흥에 뜻을 두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한 적은 무리는 누구를 가리킨 것일까요? 1절을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것으로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 하나님의 백성 모두를 포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할 수 있습니다.

 

◉ 적은 무리와 큰 무리 ◉

 

적은 무리는 1절에 서로 밟힐 만큼 모여든 수만 명의 무리와 대비됩니다. 이것을 지금의 교회의 의미로 생각해 보면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와 제자들처럼 십여 명이 모이는 아주 작은 교회로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히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 교회를 꿈꿉니다. 예수님은 수만 명의 무리에 별 다른 가치를 두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많은 무리의 수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바라봅니다. 그래서 때로는 적은 무리인 자신의 처지가 서글프게 느껴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적은 무리는 수만 명의 무리에 비해 수적으로 크게 열세에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도 적은 무리에 비해 수만 명의 모임이 더 효과적일 것이 분명합니다. 현대 교회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이것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는 무엇보다 재정적으로 넉넉합니다. 그리고 그 재정으로 구제와 선교사를 파송하는 등의 일을 한다면 적은 수의 교회와는 비할 바 없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의 기능과 결과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적은 수의 교회보다 큰 교회가 더 바람직한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적은 교회는 열악한 재정 문제로 인해서 큰 교회의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서 은연중에 교회와 교회도 사회적 구조인 갑과 을의 관계로 형성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는 말씀으로 수의 많고 적음이 중요하지 않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이 적은 무리를 언급하셨다고 해서 교인 수가 적은 것이 참된 교회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교인 수가 적은 것이 참된 교회의 기준이 된다면 애매한 것은 몇 명까지가 적은 수에 해당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수를 적은 수의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요? 그렇다면 12명까지는 적은 무리고 13명부터는 많은 무리로 봐야 합니까?

 

 

10명 모이는 교회의 시각에서는 백 명, 수백 명의 교인 수는 참으로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수천,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가 볼 때 백 명, 수백 명의 교회는 적은 무리의 교회일 뿐입니다. 그런데 현대적인 의미에서 볼 때는 적은 무리를 수적인 차이로만 계산 할 수도 없습니다. 시골에서 백 명이 모이는 교회라고 해도 도시의 몇 십 명이 모이는 교회보다 훨씬 더 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세상의 시각에서 크다 적다라는 것은 무엇을 힘으로 여기느냐는 세상의 가치관과 연결되어 판단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적은 무리로 말씀하신 그들은 수적이나 질적으로 세상에서 아무런 힘도 나타낼 수 없는 무리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 적은 무리에게 무서워 말라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무서워 말라는 것은 많은 무리들의 힘, 즉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힘없는 약자에게 두려움은 강자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에서 힘을 가지고 그 힘으로 강자의 자리에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그 나라, 즉 하나님 나라를 받은 적은 무리보다 못하다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받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세상의 어떤 힘 있는 무리에 비해서도 못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입니다. 세상은 돈이 있는가 없는가로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누가 나의 나라에 속한 자인가로 평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힘을 가진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백성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들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소망하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기다리며 삽니다.

 

 

그러면 적은 무리가 세상의 힘을 무서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그 나라를 기다리는 것이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이것을 33절에서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 다함이 없는 보물 ◉

 

우리는 구제를 소유를 모아서 넉넉해질 때 베푸는 것으로 많이 인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고 하십니다. 소유를 팔라는 것은 소유를 모으는 것에 뜻을 두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소유를 모으는 일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 그리고 노후를 위해서 부지런히 소유를 모읍니다. 구제는 소유를 모으는 과정에서 신앙인의 양심 때문에 적당히, 조금씩 행하는 수준일 뿐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소유를 팔아 구제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란 것입니까?’라는 반발이 있을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자기 생존을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로써 예수님의 말씀에 반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늘 나에게서 사라져도 무관한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유를 팔아 구제하라고 하신 것은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소유라는 것이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아님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팔아서 흩어 버린다고 해도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소유는 생명의 문제에서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소유에 마음을 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그 나라가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가를 잊고 사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고 나 또한 힘 있는 자 되기를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답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만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주어도 동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일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언젠가는 소유가 동이 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소유가 동이 나지 않도록 더 많이 채워주신다는 뜻일까요?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것은 자기 소유를 보물로 여기지 않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소유가 아닌 다른 보물을 가진 자가 구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보물이 바로 하나님이 주고자 하시는 그 나라이고, 궁극적으로는 그 나라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존귀한 보물로 바라보고 그 보물에 마음을 둔 신자만이 소유로 자신의 가치를 향상시키는 일에 뜻을 두지 않고 온전히 주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모였다면 그 수나 사회적 신분과는 전혀 상관없이 기적과 능력으로 인한 큰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부요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스스로를 부요한 자로 여길 수 있다면 소유의 부요에는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 구제하게 하는 것이고 이러한 구제가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것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물은 예수님입니다. 이 보물에는 도둑도 가까이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은 전혀 보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둑은 가치 있는 것만 훔칩니다. 그런 점에서 신자는 세상이 전혀 가치를 두지 않는 것을 보물이라며 끌어안고 사는 사람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쓸데없는 일에 지나지 않지만 신자에게는 소유를 모으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런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소유에 눈을 두게 되면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유는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지는 것이 소유입니다. 그것도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형편과 상황에 따라 사라집니다.

 

 

그래서 소유에 마음을 두면 불안하지만 보물이신 예수님께 마음을 두면 흔들리지 않는 평안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변하지 않는 하늘의 뜻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보물이신 예수님 때문에 부요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서 나타나야 할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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