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5.18 09:53

(14강) 바울의 기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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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1:15-19http://onlycross.net/videos/eph/eph-011519(3).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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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설교>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선언은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양보도 타협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서 도덕과 윤리는 얼마든지 실행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를 사망으로 이끄는 악의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운명은 사망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신앙의 모든 문제는 이것을 근본으로 해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이 죄, 즉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간과하기 때문에 교회라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그대로 답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이는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동일한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자본이 곧 힘이 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죄에서 건짐 받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능력으로 믿는 자로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능력이라면 예수님 앞에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능력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 안에서 신자는 자연히 차별이 없는 관계로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과 구원이 분명한 믿음으로 자리하고 있다면 자연히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들처럼 보이는 세상의 것을 힘으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세상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명과 구원이 분명한 은총으로 자리하지 못하고 소망을 세상에 둔 채 자기 소망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행태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 모릅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잘 살게 되었고 자식들도 성공했다고 자랑합니다. 목사는 교회가 부흥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거의 모든 목사가 하나님의 은혜를 그런 의미로 생각합니다. 결국 작은 교회의 목사는 은혜를 받지 못하고 능력도 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세속적 세계관에 붙들려 있다는 증거들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소망하십니까? 대개는 자신의 소망을 간직 한 채 자기 소망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신앙에 생명을 향한 관심은 들어있지 않습니다. 생명을 향한 관심이 없기에 소망 또한 생명으로 향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의 소망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생명이심을 믿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완전히 나타날 때를 소망하고 기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소망이 힘이 되어서 인내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함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지할 것은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달라는 요구에 많이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의 기도는 달라는 것이 아니라 알게 해달라는 것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알게 되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앎이 신앙의 핵심일 수밖에 없는 것은 신자는 받아야 할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것을 받은 자의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원하는 것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보게 되고 알게 되며 그 풍성함을 누리는 길로 가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 신앙은 받고자 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기업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을 기업으로 분배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신 것은 단지 땅을 나누어 주시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는 증표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분배된 땅에서 살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관심이 땅으로 향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이 분배하신 땅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땅을 소유하고자 하게 됨으로 인해서 부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받은 기업의 풍성은 다른 사람보다 땅이 많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이 그들의 영광이고 풍성이었습니다. 기업은 그 증거였기 때문에 풍성한 기업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즉 기업의 풍성은 많고 적음의 양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존재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그들의 존재가 곧 풍성의 참된 의미인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고 잘 되게 하실 것이다’라는 기대를 갖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이 우리의 영광이 되고 풍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유의 확대로 인한 풍성은 믿음과는 상관없는 인간의 욕망일 뿐입니다. 믿음은 신자로 부름 받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영광되고 풍성한 세계에 들어와 있는가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표를 자신에게 그리스도가 주어진 것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백성들만이 그리스도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행함을 근거로 하나님의 백성 된 여부를 확인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잘하니까 하나님의 백성이고 잘 못하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가보다’라고 자기를 판단하는 그것이 신자로 부름 받은 내막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히 9:15절을 보면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11절에서는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다고 말하고,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은 우리가 영원한 기업을 얻었음에 대한 보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령을 받은 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받을 자라는 증표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성령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풍성한 영광의 세계에 들어온 것이 됩니다. 이 같은 풍성함을 안다면 그 삶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처럼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알기를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도구로 부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신자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알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철저히 자기 유익이 삭제된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고 영광을 위한 도구로만 존재한다는 것이 살아있어야 바른 신앙의 길로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로 부르시고 기업이 되게 하신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의 가치를 알게 되면 자연히 그 영광이 풍성함으로 채워지게 되고 세상에서의 자기 유익은 포기해도 괜찮다는 고백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자의 기도에서 자신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하늘 영광의 풍성함을 알지 못한 결과입니다. 하늘의 영광보다 세상에서의 영광에 더 가치를 두고 추구하기 때문에 자신이 사라지지 않고 자기 유익이 중점이 된 기도로 흘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앎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알게 된 사람으로 인해 전파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의 영광과 풍성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 앎이 우리를 기뻐하게 하고 평강이 있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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