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6.01 10:01

(15강) 바울의 기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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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1:19-23http://onlycross.net/videos/eph/eph-01192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설교>

 

세상이 소망하는 것은 힘입니다. 그래서 저마다 강한 힘으로 다스리는 위치에 있기 위해 노력합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약자보다는 강자로 존재하기를 원하고 그 도움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새로운 소망이 자리하게 됩니다. 기존에 소망했던 것들은 헛된 것이었음을 깨닫고 참된 것을 소망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계에서 힘은 불필요합니다. 우리가 힘을 가져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스스로 주를 찾고 구원을 위해 노력하고 힘쓰는 세계가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이끌어 가시고 구원을 이루시는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계는 주를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으로 넉넉한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가?’를 생각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불안해서 그런 생각으로 자신을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까? 열심히 기도하지 않으면 자신의 믿음이 믿음이 아닌 것으로 의심되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열심히 기도하면 예수님과 상관없이 자기 믿음에 자신감을 가질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의 실상은 나의 기도 여부와 상관없이 예수님이 나의 믿음을 책임지고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19절을 보면 ‘그의 힘의 위력’이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강력한 능력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으로 되어진 일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이고 하늘 보좌 오른편에 앉게 하시고 만물을 복종하게 하시고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에게 역사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할 것이고 하늘에 앉힌바 될 것입니다. 구원될 수 없는 우리를 찾아오셔서 강력한 힘의 위력으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은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는 것일 뿐 자신의 행함을 확인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바울의 기도에는 달라는 것이 없습니다. 온통 달라는 것으로 채워지는 우리의 기도와는 달리 바울의 기도는 알게 되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대개의 기독교인은 기도를 자신에게 없는 것, 필요한 것을 구하여 채우는 수단으로 알고 있지만, 사도 바울은 이미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에 의해 되어진 복된 일들에 대해 눈이 열려 알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던 부르심의 소망, 기업의 영광의 풍성, 하나님의 강력한 능력,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되어진 일들입니다. 이미 되어진 일만으로도 신자는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같은 풍성한 은혜를 모두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신자가 얼마나 복된 존재이며 어떤 능력의 세계로 부름 받았는지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애초부터 그리스도의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 두지 않습니다.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의 세계가 관심의 전부일 뿐이고 나의 관심을 채우고 원하는 인생을 누리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세계에 마음을 두게 되고, 믿음이 무엇인가를 알아가고자 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우리를 하나님이 간섭하시며 이끄시고 강력한 힘으로 역사하신 증거가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간섭되는 신자가 곧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안다면 교회는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그 본분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교회에 관심을 두게 됨으로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 일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계획하고 원하는 일을 도우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조작해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교회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교회에 미련을 두고 있고, 내심 교회가 외적으로 확장되기를 원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우리를 여전히 붙드시고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우리가 믿음의 길에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앎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는 분이 아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것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며 십자가의 은혜만 바라보는 신자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아는 교회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것도 우리의 노력과 무관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진 것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을 복을 받기 위한 것으로 인지 하는 것이 신앙에 대한 큰 착각입니다. 이 같은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는 복의 세계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을 복의 세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일이 요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모든 일은 이미 예수님이 이루셨습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높이고 감사하기 위해 부름 받은 것입니다.

 

 

예수 안과는 무관한 부정한 존재가 거룩하신 피의 은혜로 인해 거룩한 존재로 여김 받고 그리스도 안에 고정된 복된 인생이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알기에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않게 됩니다. 다만 그리스도가 충만이 되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이것이 없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세상의 기준과 가치관에서는 없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여겨지는 것도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은 유익한 것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배설물로 표현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다는 것 때문에 낙심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신앙이라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롬 1:16절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세상이 복음의 가치를 알아주든 말든 상관없이 마지막 때가 되면 복음이 구원의 능력이라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게 됩니다. 신자는 복음의 가치를 이미 알고 있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받았고 알았다는 것으로 신자는 세상이 받지 못한 것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은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고전 1:18절에서도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합니다.

 

 

구원 받은 신자에게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구원의 능력이 됨을 알기에 십자가의 도를 알게 된 것으로 자신은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안에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가 보면 신자는 절대로 부족한 존재가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가난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복을 모르기 때문에 남보다 적게 가졌다고 인식하고 자기 현실에 실망하는 이것이 가난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부요를 모르니 항상 세상을 바라보며 그리스도 안의 세계에는 무관심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돈이 힘과 기쁨과 행복으로 여겨지겠습니까? 생명의 문제 앞에서 세상의 것은 그 어떤 것도 무용지물입니다. 이것을 단지 지식적으로 인정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실제적으로 인정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한다고 해서 병에 걸리지 않거나 병이 낫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것은 결국 매일반입니다. 모든 사람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법칙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도를 아는 사람은 죽음을 죽음으로만 여기지 않습니다.

 

 

죽은 나를 살리는 능력이 십자가의 도라는 것을 믿는다면 오히려 죽음을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의 세계를 누리는 시작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강함입니다. 돈이 아니라 믿음이 능력이 되는 삶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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