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7.06 09:25

(20강) 하나님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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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2:6-8http://onlycross.net/videos/eph/eph-020608.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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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설교>

 

모든 종교가 구원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는데 구원에 있어서 기독교는 엄연히 타 종교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의 독선으로 치부되고 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는 주장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 받는다’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타 종교가, 또는 기독교를 반대 하는 사람들이 이 말에 분노하는 이유는 구원의 기준을 행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점이 기독교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기독교라고 해도 구원의 기준을 행위에 둔다면 참된 기독교 신앙에서 벗어났다고 할 수밖에 없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기준을 행위에 두면 기독교와 타 종교의 차이점은 사라지게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독교보다 더 낫다’라고 주장하는 종교도 있을 것입니다. 종교 다원주의가 세상으로부터 환영을 받고 설득력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도 구원의 기준을 행위에 두기 때문입니다. 행위에서 동질감이 보인다면 같은 진리의 길을 가는 것으로 간주하고 같은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원을 이미 성취된 사건으로 말합니다. 이것은 구원이 행위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만약 구원의 기준이 행위에 있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가 끝난 후, 즉 죽음 이후에 구원의 여부가 결정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5절에 보면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라고 말합니다. 살리셨다는 것은 이미 완료된 사건임을 뜻합니다. 또한 6절에서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씀도 이미 완료된 사건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음을 증거합니다. 구원의 근거가 인간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구원관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 행위에 대한 보상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물론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복을 주겠다는 내용이 있지만 그것은 행위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근거로 복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은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켜 행할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내가 평생을 예수를 믿기 위해 힘썼는데 왜 복을 주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런 생각이 있다면 그 믿음은 가짜이며 아직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 됩니다. 자신이 예수를 믿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이미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로 말하고 공짜로 얻었다고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구원이 은혜임을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나는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고 지옥 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신자에게는 구원의 근거가 되고 완성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 안에 있는 신자는 무엇을 하든 그것을 은혜에 따른 자연적인 행동으로 여길 뿐 자기 의지와 결단에 의한 자기 행함으로 간주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의도와 무관하게 기계적으로 행하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나의 의지와 생각조차도 하나님에 의해 간섭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고자 하는 것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의 믿음이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되기를 소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 또한 나의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어떤 선한 생각과 의지와 믿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내가 선한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믿음을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지만 구원이 되는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합니다. 즉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게 되고 구원 받고 싶다고 해서 구원 받는 방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시행되는 은혜로 인해서 전적 무능력한 상태의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하게 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허락된 은총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이 작정하신 사람에게만 믿음이 주어지고 믿음이 주어진 그들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전도는 의미 없는 것일까요? 전도는 누군가를 설득하여 교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가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다만 은혜의 복음을 전했을 때 하나님이 믿음을 선물로 주신 사람이라면 그 복음을 들음으로 그리스도를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전도는 하나님이 택한 자기 백성을 부르시기 위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일에 사용되는 도구인 것입니다.

 

 

하지만 전도가 택한 백성을 부르시기 위한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 15:22절에 보면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지 못하고 미워하며 예수의 아버지도 미워한 죄를 핑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믿지 않은 죄를 핑계할 수 없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전도 또한 듣고도 믿지 않은 자들을 심판하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분명히 증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인간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열심을 강조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믿음을 알지 못한다는 반증입니다. 은혜의 믿음에 초점을 두고 풍성하신 은혜를 나타내는 것에 하나님의 뜻을 두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빙자하여 교인을 이용하고 교회를 성장시켜 보겠다는 발상일 뿐입니다.

 

 

눅 3:8절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이 착각했던 것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다른 민족과는 다른 우월한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돌들로도 되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고 해서 특별히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게 시선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것으로 우월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 전하는 일에 힘썼을 뿐입니다.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택정함을 입어 믿음을 선물로 받았고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구원 받았다고 여기신다면 그 은혜를 나타내면 됩니다. 이것이 오고 오는 세대에 중지되지 않고 계속되어야 할 여러분의 일입니다.

 

 

바울이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 받은 일에서 절실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예수를 믿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오셨고 예수님을 알게 하신 결과입니다. 바울의 노력과 열심은 전혀 개입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열심은 예수를 핍박하는데 앞장섰을 뿐입니다.

 

 

바울은 모든 것이 주가 하신 일이고 자신의 주의 그 의지에 붙들려 순종되었음을 알게 되었기에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증거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이 은혜를 나타내는 일에 힘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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