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7.13 10:13

(21강) 선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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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2:8-10http://onlycross.net/videos/eph/eph-0208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설교>

 

사도 바울은 구원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행위와 업적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구원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의 행위와 업적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증거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이단이라 할지라도 ‘나는 나의 공로로 구원 받았다’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단임을 감추기 위해서 더 철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음을 강조할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나 알고 있는 당연한 내용이니까 깊이 생각할 필요 없이 넘어가면 되는 문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의 교회에서 강조하는 믿음을 보면 긍정적, 적극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습니다. 즉 긍정적 신앙, 소극적이 아닌 적극적 신앙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을 인간의 행위와 연결하여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왜 믿음은 인간의 행위와 연결하여 이해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믿음에 대한 이해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본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 이견이 없이 받아들인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사도 바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게 하는 믿음의 출처는 어디일까요? 만약 믿음이 우리 마음, 의지에 달린 문제라면 구원은 내 행위, 업적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로 인해 받게 된 것이 됩니다. 구원을 받게 하는 믿음의 출처가 바로 내 자신이 되기 때문입니다. 내 의지와 열심히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출처는 절대로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의지나 긍정적, 적극적인 마음 그런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도 믿음의 출처가 너희 자신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성격, 기질이라고 할 수 있는 긍정적, 적극적이라는 것을 믿음과 연결하여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긍정적 신앙, 적극적 신앙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믿음을 인간의 행함과 연결하여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믿음다움은 행함으로 나타난다고 생각하고,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행동보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믿음 또한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제멋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믿음이 가만히 있지 않고 활동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있는 것은 죽은 믿음이고, 활동하는 것이 산 믿음이기 때문에 활발하게 활동할수록 힘 있는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 속에 긍정적 신앙, 적극적 신앙이 마치 참된 믿음인 것처럼 강조되어 온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의 활동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으로 말합니다. 이유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도 구원 받을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함으로 구원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행함을 묻지 않으시고 믿음을 주셔서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신 것이야 말로 은혜이고, 이 은혜를 알고 은혜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믿음은 충분한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인간을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세상 누구도 숨을 쉬며 살아있는 인간을 두고 죽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에 대해 연구하는 철학자들도 ‘인간은 존재 한다’로부터 시작하지 ‘인간은 죽었다’로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죽었다’로부터 시작한다면 더 이상 진척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었다면 죽은 것으로 끝납니다. 죽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올 것도 없기 때문에 언급될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죽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해 증거하고 그 은혜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은혜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라는 바울의 선언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헛된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이 있다면 믿음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있지 않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분명 믿음에 의한 열매가 있기 때문에 믿음에 의해 나타나는 것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믿음을 확인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교회생활과 선한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은 내가 아닌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로 감사하게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나오는 것으로 믿음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 자체가 믿음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만약 ‘기도하는 것이 믿음이다’고 하면 기도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기보다는 ‘기도를 얼마나 하는가?’로 믿음의 크기를 저울질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의 습성입니다. 이 습성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은혜를 찬송하고 은혜로 말미암은 구원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증거를 가지고 있는 자신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는 말에서 나에게서 구원 받을만한 선함도 의로움도 나올 수 없음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선언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는 것은 죽은 자인 우리에게는 허물과 죄 밖에 나올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허물과 죄가 99%인데 1% 의로움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죽은 자를 하나님이 살렸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 자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산자가 되었으니 의로움이 나올 가능성이 있게 된 것이 아닐까요? 즉 의를 행할 자질이 부여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살았다는 의미는 의를 행할 자질이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악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에 눈이 열리게 됨을 뜻합니다.

 

 

죽은 자는 마음에 하나님두기도 싫어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으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관심은 온통 세상에서의 삶으로만 향해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을 살리셨다면 그 생명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요?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세상으로만 향해 있던 삶의 헛됨을 깨달으며 자신이 죽은 자였으며, 그러한 나를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마음이 향하게 되는 것으로 생명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물이라는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차라리 의와 선을 행하는 자질과 능력을 주셔서 행하게 하시고 우리의 행함을 보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시면 안 되는 것일까요? 만약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이시라면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구원만 받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다른 뜻이 있습니다. 그것이 7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예수 안에서의 자비와 은혜의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기 위함이고 이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9절을 보면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나의 행함을 자랑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자랑해야 할 것이 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바울처럼 나를 자랑하지 않는 것이 선한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 선한 일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삽니다. 차별되지 않은 동일한 은혜 아래 있는 것이 신자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관계에서 나타날 것은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과 긍휼뿐입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서 선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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