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2.20 20:22

(126강) 천국과 품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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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0:1-16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00116.w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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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3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설교>

 

◉ 포도원 일이 목적이 아닌 품꾼 ◉

 

베드로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는 말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것을 보상 받을 자격이 있는 가치 있는 행동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는 그의 고백을 근거로 한다면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렸지만 결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존귀한 분을 얻은 것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 것은 예수님이 함께 하심의 의미를 모르는 것이고 단지 자신이 한 일의 가치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자신이 한 일에 대한 가치에 염두를 두게 되면 그에 대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할 때, 그리고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일을 한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대우를 받을 때 부당하다는 반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적 계산이 천국에 해당되지 않음을 말씀하는 것이 포도원 품꾼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을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으로 비유합니다. 집 주인이 천국으로 비유된다면 집 주인의 행동이나 말 하나하나는 천국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은 먼저 하루 한 데나리온씩의 삯을 주기로 약속하고 품꾼을 포도원에 들여보내 일하게 합니다. 그런데 주인이 다시 삼시에 장터에 나가보니 놀고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그들에게 상당하게 주리라고 약속하고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유대인이 시간이 우리와 여섯 시간 차이가 있음을 생각하면 삼시는 9시에 해당이 됩니다.

 

 

놀고 있는 사람을 포도원에 들여보내는 일은 육시와 구시, 즉 열두시와 오후 세시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에 해당되는 십일시에도 나가보니 여전히 일을 하지 못하고 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까지 포도원에 들여보냅니다.

 

 

주인의 이 같은 조치는 일반적인 주인의 행보와는 전혀 다릅니다. 포도원에 일이 많아서 품꾼이 더 필요 했다면 삼시에 나가 추가적으로 품꾼을 구하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육시와 구시에도 나가서 품꾼을 부르고, 더군다나 십일시에도 나가서 놀고 있는 품꾼을 불렀다는 것은 품꾼을 부른 이유가 포도원의 일을 하기 위함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포도원의 일을 맡기는 것이 주인의 관심이라면 구시와 십일시에도 품꾼을 부른 것은 일반적 상식과 맞지 않습니다. 유대인의 하루는 오후 여섯시까지이기 때문에 구시에 들어온 사람은 3시간 일을 할 수 있고, 십일시에 들어온 사람은 겨우 1시간 동안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면 주인은 놀고 있는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 부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자비의 마음으로 부른 것입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일꾼들에게 그날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양식을 구할 수 없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 이상한 품삯 계산 ◉

 

 

품꾼들은 언제 부름을 받았든 그들 모두는 주인이 불러주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주인이 포도원 품꾼으로 불러준 덕분에 가족들의 하루 생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부름 받은 품꾼들에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고 지시합니다. 가장 늦게 온 사람은 십일시에 왔습니다. 그 사람은 겨우 한 시간 일을 했을 뿐입니다. 때문에 그 사람은 하루 일당을 다 받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한 데나리온이 지급됩니다. 그 품꾼의 놀람과 주인에 대한 고마움이 어떠했을 거라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늦게 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본 다른 품꾼들은 자신들은 일을 더 많이 했으니 한 데나리온보다는 더 많이 받게 될 것으로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품꾼에게 지급된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러자 먼저 와서 일을 많이 한 품꾼들은 주인에게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12절)고 원망을 합니다.

 

 

이 같은 원망은 누가 봐도 당연한 것입니다. 열 두 시간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이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분명 공평하지 못한 처사이기 때문입니다. 한 시간 일한 사람이 열 두 시간 일한 자신과 동일한 품삯을 받는 것을 보면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른 차별적 대우가 질서입니다. 일한 만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회사가 열 두시간 일한 사람과 한 시간 일한 사람을 동일하게 대우한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까요? 아마 모든 사람들이 일찍 와서 일하면 그만큼 손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서로 늦게 와서 일을 적게 하려고 할 것이고 결국 회사는 파산되고 말 것입니다. 일한 만큼 차별적 대우를 받아야 열심히 일을 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원망을 하는 그 중의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13-15절)

 

 

주인의 말을 들어보면 주인이 잘못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주인이 애당초 약속한 것은 한 데나리온이고 품꾼은 약속한 일당을 받았습니다. 주인이 누구에게 얼마를 주던 그것은 주인의 돈을 주인이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품꾼이 간섭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먼저 온 사람은 나중 온 사람이 자신과 동일하게 받는다는 것에 대해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 먼저 온 사람과 늦게 온 사람의 수고는 다릅니다. 먼저 온 사람은 늦게 온 사람보다 더 많은 수고를 했고 땀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노동의 차이는 있지만 주인은 노동의 차이를 보고 삯을 계산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주인이 노동의 차이를 보고 삯을 계산했다면 한 시간 일한 사람은 한 데나리온의 십이분의 일을 받았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먼저 온 사람은 만족했을 것입니다. 늦게 온 사람보다 더 많은 삯을 받음으로 먼저 와서 많이 일하고 수고한 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았다는 기분이 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 먼저와 나중이 없는 천국 ◉

 

 

이러한 계산법이 적용된 것이 천국의 상이 다르다는 논리입니다. 많은 사람이 천국의 상이 다르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많이 일하고 많이 수고하고 많이 헌신 했으면 그만큼 더 많은 보상을 받게 된다는 계산법이야 말로 사람들의 속성과 일치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가 천국의 상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일한 만큼 차별적 대우를 받음을 말함으로써 교인들의 경쟁심을 자극하고 좀 더 많은 수고를 이끌어 내기 위한 노림수가 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사실 모든 품꾼에게 동일한 삯을 지불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앞으로 포도원을 운영하는데 곤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먼저 부름 받아 일하기보다는 나중에 부름 받으려고 할 수 있고, 먼저 부름을 받았다고 해도 부지런히 일하려고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가 ‘천국의 상이 동일하다’는 말을 한다면 누가 열심히 일하고 봉사하려고 하겠느냐는 염려가 앞서게 될 것이고, 때문에 ‘천국의 상이 동일하다’는 말을 탐탁지 않게 여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주인의 품삯은 노동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그들의 생계를 염려하는 자비의 마음이었습니다. 따라서 품꾼들은 삯을 자신이 노동한 것에 대한 보수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주인이 불러주지 않았으면 그 날은 모든 식구가 굶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불러주신 자비로 여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원망은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먼저 왔던 늦게 왔던 모두가 동일하게 주인의 자비를 누리는 것으로 감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이야기의 결론을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16절)는 말로 내리십니다. 이 말씀은 19:30절의 말씀과 순서만 다를 뿐 동일합니다.

 

 

이 말씀은 교회에 출석한 순서대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와 천국의 질서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전혀 새로운 질서를 가지고 임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따라서 여전히 세상의 질서에 묻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비라는 새로운 천국 질서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열심과 수고가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 것을 합리적인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는 베드로의 계산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계산법은 먼저 된 자를 나중 되게 할 뿐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비는 나중 된 자를 먼저 되게 합니다. 이것이 천국의 질서입니다.

 

 

◉ 일이 아닌 자비와 은혜의 관계 ◉

 

 

세상은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교회에 10년 출석한 사람이 20년 출석한 사람을 추월하여 먼저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더 많이 노력하고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먼저 출석한 사람이 늦게 출석한 사람에게 추월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한 먼저와 나중의 의미가 전혀 아닙니다.

 

 

주인에 대해 원망한 품꾼들의 잘못은 주인이 준 한 데나리온을 자기 노동에 대한 대가로 여긴 것입니다. 노동에 대한 대가로 여겼기 때문에 자신보다 적은 노동을 한 사람이 자신과 동일한 삯을 받는 것을 부당하게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한 데나리온은 주인의 자비입니다. 자비로 부름을 받았고 자비에 의해서 한 데나리온이 주어진 것입니다. 애당초 노동을 조건으로 부르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인과 품꾼의 관계입니다.

 

 

신자와 예수님의 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노동을 조건으로 한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일한만큼 보상을 받는 관계에 있지 않고, 자비와 은혜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받는 그것은 우리가 한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자비이고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부자 청년의 잘못은 영생을 선에 대한 자신의 실천의 대가로 여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율법을 신앙의 근본으로 삼고 있는 유대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이 자비로 인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절대로 우리가 일한 것에 대한 보상도 대가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러한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를 살리는 것이지 우리가 일한 것의 대가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는 이처럼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동일합니다. 일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그것으로 차별되지 않는 것이 신자의 관계이며 천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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