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3.20 18:13

(130강) 나귀 새끼와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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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1-11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10111.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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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6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이르되 이는 누구냐 하거늘

11 무리가 이르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설교>

 

◉ 선지자의 말을 이루기 위함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기 위해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 두 제자를 맞은 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면 즉시 보낼 것이라고 하시고, 제자들은 그 말씀대로 마을로 가서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오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의 내용에서 나귀 새끼를 데려오는 방법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부분입니다. 나귀 새끼가 마치 예수님의 소유인 것처럼 다루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위해 미리 사람을 보내 준비해 놓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인간의 상식과 이해에 맞게 인위적으로 구성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귀의 주인이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나귀와 나귀 새끼를 내어주는 것은, 주가 누구신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주에 대한 믿음이 복종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나귀 새끼를 데려오는 과정은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라고 봅니다.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는 선지자의 말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선지자의 말을 이루기 위해서라는 것은 슥 9:9절을 말합니다. 이처럼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아로 오시는 주는 왕으로 오시지만 겸손하여 멍에 매는 짐승을 타신 분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이유입니다.

 

 

◉ 예수님의 겸손 ◉

 

 

세상이 생각하는 왕의 모습은 한마디로 권위와 권세입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으로 자신을 과시하기 십상이고, 권위와 권세가 있는 사람은 자신의 권위와 권세를 드러내고 싶어 합니다. 때문에 권위와 권세를 모두 갖고 있는 왕이라면 수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힘 있는 말을 타고 입성을 할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이러한 왕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루실 나라는 유다가 중심이 된 강력한 나라일 것으로 기대하면서, 예수님이 왕이 된 그 나라의 좌우편을 차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힘과는 상관없이 약하고 초라함의 상징인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겸손의 왕으로 오신다는 선지자의 말을 이루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겸손은 어떤 것일까요? 말을 타는 것이 마땅한데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이 겸손일까요? 가령 부자가 또는 권세 있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자기 신분에 걸맞은 고급차를 타지 않고 경차를 타면 그것이 겸손일까요? 대개는 겸손을 그렇게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가난하고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서의 겸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겸손이 어떤 것인가는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라는 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멍에 매는 짐승은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복종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한 짐승의 새끼를 타신 것은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와 자신을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즉 멍에 매는 짐승이 가는 종의 길, 그것도 새끼라는 힘없고 비천한 가장 낮은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자신임을 나귀 새끼를 타는 것으로 보여주신 것이 겸손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자신을 낮은 길을 가야 할 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처럼 높은 자리에 앉기를 원합니다. 그것이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힘 있는 자로 존재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교만인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겸손하다고 일컬음 받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겉으로는 고개 숙이고 드러내지 않는다고 해도 항상 자기 이름이 높임 받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겸손은 도덕적 의미의 겸손과는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 세 번이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죽는 길임을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대하는 높아지는 길을 가기 위해 오시지 않았음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무시하며 여전히 높아짐이라는 욕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좌우편의 자리를 두고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 갈릴리 나사렛과 예수님 ◉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자 무리의 대다수가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폅니다. 그리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고 외칩니다. 비록 나귀 새끼를 타셨지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은 조용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많은 무리가 ‘호산나’를 외치면서 떠들썩했습니다.

 

 

이처럼 떠들썩한 입성으로 인해 온 성이 소동하면서 ‘이는 누구냐’라고 하자 무리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합니다. 갈릴리 나사렛은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낮고 비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에 사람들에게 무시와 천대를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오신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 시작도 마지막도 세상의 힘과는 전혀 상관없는 길을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오신 바로 그분입니다. 힘과는 상관없는 분을 구세주로 믿고 그 분이 가신 길이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임을 믿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만약 예수님에게서 힘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가신 길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내가 가고 싶은 길만 생각하게 됩니다. 힘을 얻고 높아짐을 얻는 길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입니다.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힘없는 분으로 보내셨을까요? 왜 유다의 힘 있고 명망있는 가문을 택해서 보내시지 않으시고 천한 목수의 아들로 보내셨을까요?

 

 

우리는 힘이 있어야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명망 있는 가문을 배경으로 하고, 학력과 지식과 실력이 있어야 원하는 일을 하고 많은 일을 이룰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유대인들이 영웅 같은 메시아를 기다린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유다를 해방하고 유다가 중심이 된 강력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는 힘 있는 영웅 같은 존재가 등장해야 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기대와는 다르게 가장 낮은 자리에 가장 힘없는 분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는 길을 가시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힘 있는 자 되기 위해 예수를 믿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큰 착각입니다.

 

 

우린 지난 시간에 소경들이 예수님에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는 말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김 받을 자로 바라보는 눈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김 받을 자로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세상의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그것으로 불쌍함이 가려지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소경이라는 형편은 돈이나 권력 같은 세상 것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다윗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의 자비하심으로만 해결됩니다. 그런데 자신의 불쌍함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가리고 치장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 구원으로 삼는 것입니다.

 

 

인간의 불쌍함은 저주 아래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누구든 예수님 앞에 나오는 그가 구원 받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신 낮은 길을 가신 분이기 때문에 낮아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 낮아짐이 바로 자신을 불쌍한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무엇이 있든 상관없이 죄로 인해 저주라는 비참함에 빠질 수밖에 없는 본질을 바라보면서 불쌍한 자가 바로 자신임을 아는 것이야 말로 낮아짐이고, 낮아진 자리에서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신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 신자의 길 ◉

 

 

이처럼 예수님의 오심이나 가시는 길은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하면서 예수님을 따르고 외쳤던 사람들도 예수님이 누구시며 가시는 길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외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나중에 그들이 예수님에게 등을 돌리고 오히려 죽이는 일에 가담을 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들이 호산나를 부르면서 외친 것은 예수님이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해주실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붙들려 십자가를 메고 있는 예수님의 나약한 모습을 보면서 그 모든 기대가 무너짐으로써 등을 돌린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예수님을 높이며 따랐지만 예수님이 가시는 길과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은 전혀 달랐고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비록 예수님을 따른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의 길을 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현대 교회가 간과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호산나’라고 외쳤던 사람들처럼 ‘주여 주여’라고 외치면 예수님을 따르고 열렬히 믿는 것으로 여기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이 어떠한 길인가를 알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신 그 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채 ‘주여’라고 외친다면 결국 낮아진 길을 가신 예수님에게서는 등을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예수님은 과연 누구십니까?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예수님에게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십니까? 신자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자로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의 삶에 예수님을 아는 신앙의 흔적이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고 성경을 안다고 하고 예수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만은 놓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부족함과 불의함을 앞세우며 주의 이름을 부르고 회개하면서 지체가 함께 하는 교회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조그만 일이라도 찾아 말없이 행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가신 낮아진 길에서만 만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 길이 어떤 것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 길로 이끄실 때 순종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예수를 말하면서 가는 길은 전혀 다른 것이 아닌지 스스로를 부지런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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