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1.04.03 13:36

(132강) 말라버린 무화과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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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21:18-22http://onlycross.net/videos/matthew/ma-211822.m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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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설교>

 

예수님께서 무화나무를 저주하여 말라버린 본문의 이야기는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마태가 기록한 본문의 내용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주일에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성전을 둘러보시고 베다니로 가십니다.

 

 

다음날 아침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오시면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오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시는 일을 하시고 날이 저물어서 성밖으로 나가십니다. 그리고 다시 다음날 아침에 길을 지나실 때 무화가 나무가 마른 것을 보고 베드로가 질문을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마가복음에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월요일에 있었던 일이고 저주 받은 나무가 말라버린 것은 다음 날 화요일에 있었던 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나무를 저주하시자 곧 바로 말라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건이 기록된 순서를 본다면 마태는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을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 앞에 있었던 것처럼 나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혀 다른 차이들로 인해서 성경의 오류를 말하기도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러한 차이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일 뿐 성경의 오류는 아닙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하신 일의 사실성보다는 예수님이 일하신 사건들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건의 순서를 무시하고 배열하여 예수님을 증거하고자 하기 때문에 마가복음과 차이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마가는 예수님의 행적을 사실 그대로 전하고자 하기에 상대적으로 마태복음보다는 자세하게 기록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이해할 수 없는 저주와 예수님의 답 ◉

 

 

성경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일을 두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보면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내용이 모호합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많이 시장하신 상태였습니다. 길 가에 무화과나무 하나를 보시고 가셨지만 열매는 없고 잎사귀만 무성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시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버립니다.

 

 

하지만 당시는 열매를 맺을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열매가 없는 것이 당연했고 그렇다면 예수님이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은 억지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나무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억울한 일을 당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나무가 말라버린 것을 본 제자들이 이상하게 여겨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물음의 의도는 나무를 곧 말라버리게 하신 예수님의 일에 대한 궁금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생각할 때 나무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열매를 맺어야 할 시기에 열매가 없다면 그것은 나무가 부실하여 쓸모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말라버리게 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열매가 없는 시기에 그같이 하시는 것은 제자들의 생각에도 쉽게 납득이 안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질문한 이유라면 예수님은 열매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열매가 없는 것이 어떤 상태이며 왜 말라죽는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시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듣는 사람을 매우 답답하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난데없이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내용만 보자면 마치 ‘의심하지 않는 믿음만 있다면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말 한마디로 나무를 말라버리게 할 수 있을 것이고, 심지어는 산을 들어 바다에 던져 버리는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니까 믿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기도를 하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어떻게 하면 말 한마디로 나무를 마르게 하는 능력을 행할 수가 있는지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의 내용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 말의 권세 ◉

 

 

먼저 열매를 맺을 시기가 아니기에 열매가 없는 것이 당연한 나무를 저주하신 것에 대해서는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잎만 있을 뿐 열매가 없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지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한 분풀이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생명이 없어서 말라 죽은 것과 같은 상태로 있는 이스라엘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로 활용을 하신 것입니다.

 

 

당시 성전에는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눈에 그들은 잎만 무성한 나무였을 뿐입니다. 그들은 제사라는 종교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 모여들었을 뿐 피로 인한 죄용서나 생명의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성전을 세우셨는지 보다 성전에 나가서 제사만 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영원히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말라죽어야 하는 이스라엘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게 보면 나무를 저주하시고 나무가 말라죽은 일은 심판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나무가 말라죽은 일이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답도 심판과 연관된 말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답은 능력에 대해 언급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산을 바다에 던진다는 말을 능력을 행하는 의미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은 누구도 행할 수 없는 초월적 능력을 의미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라는 말씀은 ‘말 한 대로 되어진다’는 뜻입니다. 산을 향해서 ‘바다에 던져지라’고 말했는데 그 말에 산이 순종하여 바다로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권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이 이는 바다를 향해서 ‘잠잠하라’고 하셨을 때 바다가 잠잠해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신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를 보여주신 것인지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는 말씀에서 의미하는 ‘이런 일’은 예수님처럼 나무를 말라버리게 하는 능력의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시는 심판의 일을 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주어진 권세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을 예수님의 심판의 권세에 참여시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산을 바다에 던진다는 것도 심판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다에 던져 버리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따라서 나무를 마르게 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는다는 말씀을 하실까요? 신자에게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마 18:18절에 보면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주어진 권세입니다. 이 권세로 인해서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늘의 권세를 받은 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말 또한 권세 있는 말로 그대로 시행되어진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적 시각으로 보면 권세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이 장차 이스라엘이 중심이 된 강력한 나라를 세워서 강한 권세자로 등장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권세는 그처럼 물리적이고 정치적인 힘을 가진 권세가 아니라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라는 것을 나무를 마르게 하는 것으로 드러내시는 것이고, 제자들 역시 그 권세에 속한 자로 부름 받았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 권세에 속한 신자 ◉

 

 

이것은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권세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우리의 말을 세상이 들어주지 않습니다. 힘없는 자의 말이기 때문에 무시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신자는 예수님의 권세에 속한 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는 말은 권세 있는 자의 말이며 따라서 그 말대로 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 하늘의 권세를 거부한 것이기 때문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한 일이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1:12에 보면 빛으로 오신 그 분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권세가 주어진 것으로 말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을 권세로 실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권세라면 권세 앞에 고개를 숙이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권세답고 권세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신자 자신부터 하나님의 자녀라는 권세를 잊어버리고, 심지어 권세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서 항상 세상에 대해 당당함을 잃은 채 세상과 동일하게 힘으로 여기는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소위 힘다운 힘을 가진 자로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복음을 전할 때 세상은 그 복음이 기준 되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신자가 전하는 말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심판을 위해 부르신 도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한 사람은 누구든 저주를 받게 됩니다.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처럼 영원한 저주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께 속한 자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신자의 말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심판을 받게 됩니다. 신자의 말에는 이런 권세가 있습니다. 이것을 의심 없이 믿는 그가 바로 예수님의 권세에 속한 자입니다.

 

 

신자가 증거하는 복음의 말씀은 힘없는 사람의 말이 아닙니다. 하늘의 권세에 속한 자의 권세 있는 말입니다. 누구라도 그 말을 거부하면 심판해 버리는 권세 있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복음을 증거한다면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을 보지 않고 복음의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 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곧 권세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구든 그 말을 받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 권세 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하고, 하늘의 권세에 속한 예수님의 사람으로서 죽음의 권세까지 두려워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증거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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