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13.10.06 09:43

(80강) 칭찬 받은 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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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6:1-13http://onlycross.net/videos/nuk/nuk-160113.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설교>

 


◉ 버려야 할 원칙 ◉

 

본문의 비유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면서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주인이 옳지 않은 청지기의 행동을 지혜 있는 것으로 칭찬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상식은 옳지 않은 행동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책망하여 고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러한 상식과는 전혀 상반된 행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본문의 내용이 낯설게 다가오면서 혼란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본문의 주인이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은 옳지 않은 행동을 오히려 지혜 있다고 칭찬한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해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본문에는 우리의 정서로는 해석할 수 없는 문구들이 있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과 11절의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라는 구절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불의한 것은 버려야 하고 멀리해야 할 대상으로 구분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내 자신이 불의해지지 않고 깨끗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불의한 것을 가까이 하면 나 또한 불의해 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 원칙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원칙이 과연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15장에 보면 이 원칙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깨끗함을 지키기 위해 불의한 것을 멀리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세리와 죄인들은 물론이고 이방인도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을 영접하고 같이 음식을 먹은 것 때문에 수군거리며 비난한 것도 그러한 원칙에 의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 칭찬 받는 믿음 좋은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불의한 일은 행하지 않고 항상 의로운 행동만 해야 하고 충성스러운 종이 되어야 한다는 지극히 종교적인 상식이 우리에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옳지 않은 청지기를 칭찬한 주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비유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하는 것은 불의한 것을 멀리 하여 깨끗한 신자 되는 것이 신앙이며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생각입니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고방식을 예수님께서 문제 삼고 계시며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15장의 비유의 내용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들이 그들과 동일한 원칙에서 신앙을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본문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 부자와 청지기 ◉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한 비유에는 부자와 청지기가 등장합니다. 이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 자였습니다. 아마 주인의 소유가 제 것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아끼지 않고 헤프게 허비한 것 같습니다. 주인으로서는 이런 청지기를 계속 그 자리에 둘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청지기를 불러 해고를 통보합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청지기는 앞으로의 생활을 걱정합니다. 하지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라고 한 것처럼 생계를 위해 마땅히 할 일이 없었던 청지기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이 청지기 자리에서 물러나 생계가 곤란하게 되었을 때 자신을 영접하여 도와줄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청지지가 생각해 낸 방법은 주인의 재산을 더 축내는 옳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는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기름 백말을 빚진 자에게는 증서에 오십으로 쓰게 하고, 밀 백 석을 빚진 자에게는 증서에 팔십으로 쓰게 하는 방식으로 차용증서를 위조한 것입니다.

 

 

결국 주인에게 빚진 자들은 청지기로 인해서 큰 이익을 얻게 되지만 청지기는 분명 증서를 위조하는 불의한 방법으로 자신의 앞날을 준비한 것이고 주인에게는 큰 손해를 입힌 결과를 초래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이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다며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고 칭찬합니다.

 

 

이 말을 문구대로 이해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자기 인생을 위해서 술수를 부리고 불의한 방법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빛의 아들들의 삶의 방식보다 더 지혜롭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렇다면 신자도 세상에 지지 않고 이기기 위해서 세상과 동일하게 때로는 술수도 부리고 불의한 방법을 사용해도 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결국 불의를 선한 것으로 선동하는 말씀을 하신 결과가 될 것입니다.

 

◉ 청지기의 지혜 ◉

 

본문의 말씀은 일단 법적인 기준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법적인 기준으로 접근한다면 청지기는 해고만으로 끝날 수 없습니다. 증서를 위조하고 주인에게 큰 손해를 입혔으니 지금의 법에 의하면 업무상 배임죄에 해당되고 처벌을 받아야 할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결코 칭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탕자의 비유와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버지에게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요구하고 그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여 모두 허비해 버린 것은 아버지에 대해 완악하고 패역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는 만약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의 부모가 그 아들을 끌고 장로들에게 나아가 아들의 행위를 고하고 성읍의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신 21:18-21). 이것을 보면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완악하고 패역하며 방탕한 아들을 법적인 기준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대하였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에 불만을 드러낸 자가 맏아들이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법적인 기준으로 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법적인 기준에서 생각한다면 아버지의 집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충성한 자신이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할 아들이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니 불만이었던 것입니다. 이 맏아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실상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분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는 맏아들처럼 아버지의 집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것을 참된 신앙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맏아들처럼 한 가지 잊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악함입니다. 맏아들은 돌아온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보다는 성실하게 일한 자신에 대한 아버지의 보상에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본성이며 악함이라는 것을 성실하게 일했다는 것으로 덮어 버린 것입니다.

 

 

주인은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 것으로 인해 해고를 통보했습니다. 그것은 청지기의 행동이 옳지 못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왜 또 다시 옳지 못한 방법으로 주인의 소유에 손해를 끼친 행동에 대해서는 지혜롭다고 하며 칭찬을 하는 것입니까?

 

 

또 다시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둘째 아들의 옳지 않은 요구를 그대로 들어줬습니다.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도록 허용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비참한 상황에 처하게 해서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갖게 하고 아버지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주인을 하나님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청지기를 해고하면 생계가 곤란하게 될 것을 알면서도 해고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의 문제를 위해서라면 주인에게 손해가 되고 불의한 방법이라고 해도 상관하지 않는 이기적인 본성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자기 생계를 위해서 이기적인 본성을 드러내는 청지기를 이용하여 오늘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삶을 살고 있는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불의를 드러낸 그 청지기를 칭찬함으로써 세상 방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 천국이라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불의한 자는 비판을 받고 선을 행한 자들이 칭찬과 존경을 받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모르는 것은 선으로 보이는 행동에 가려져 있어서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인 불의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청지기는 인간이 어떤 방식으로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신 것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을 지혜롭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소위 빛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법을 지킨다는 것으로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는 것보다는 이 세대의 사람들처럼 자신의 본성을 따라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더 낫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본성이 드러남으로써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 불의의 재물과 친구 ◉

 

 


그러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친구는 자신에게 재물이 모두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주할 처소로 영접해 줄 수 있는 친구를 말합니다. 즉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비천한 신세가 되었음에도 개의치 않고 영접해 주는 친구입니다.

 

 

이 친구가 누구를 의미하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 개의치 않고 영접해 주실 분입니다. 십자가가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을 친구로 사귀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쫓겨났을 때의 자신의 신세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영접해줄 친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인들은 자신이 주인에게 쫓겨날 불의한 청지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성실하게 일한 충성스러운 아들이라고만 생각합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이 어떤 의미에서 친구가 되시는지에 대해 알지 못한 것입니다.

 

 

불의한 재물은 오로지 자기 생존을 위해서 주인의 손해에는 전혀 관심두지 않은 청지기의 불의, 바로 우리 자신을 의미합니다. 신자는 자신의 불의함을 보게 됨으로 인해서 불의한 나를 영접할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십자가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13절에 보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이 원칙입니다. 이 원칙 앞에서 우리 스스로를 과연 옳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기고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섬기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이기보다는 재물에 매인 것이 우리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재물을 떠나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 본성은 늘 나의 생존 문제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재물로 살 궁리를 하고 살아가면서 사실상 재물을 섬기고 있는 우리의 불의함을 볼 것을 촉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 해고 된 자 ◉

 

불의한 우리가 모든 것을 잃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것을 잃었을 때가 언제입니까? 세상을 떠나는 죽음의 때입니다. 그 누구도 죄가 없는 의로운 자로 죽지 않습니다. 심판이 마땅한 불의한 자로 죽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죽음의 그 순간에 우리는 모든 것을 잃고 다만 불의한 자라는 그것 하나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 그것이 지금 여러분의 현실이라면 과연 누가 여러분께 진정으로 필요한 분이겠습니까? 당연히 우리의 모든 불의를 용서하시고 덮어주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청지기가 옳지 않음으로 인해서 주인에게 해고 통지를 받은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께 우리의 옳지 않음으로 인해서 이미 해고 통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해고 통지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충실한 청지기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해고 통지 후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소위 빛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들의 현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청지지가 지혜롭다고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는 적어도 해고 통지를 받아들였고 해고된 후의 자기 앞날을 위해 친구를 사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11절을 보면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 자에게 참된 것을 맡긴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불의함을 깨닫고 예수님을 친구로 사귀는 그에게 참된 것, 하늘의 생명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현대 교인들은 신앙생활의 의미와 목표를 주일을 잘 지켜 예배에 빠지지 않고,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사람에게 덕을 끼치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한 삶도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신앙의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 해고 통지를 받은 불의한 자임을 알고 그런 자신을 영접해 줄 친구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사귀는 일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릴 그 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잃은 나를 영접해 줄 친구를 사귀는 일입니다. 우리가 불의한 자라는 것을 늘 실감하면서 예수님을 사귀는 일에 충성하는 것이야 말로 인생에서 가장 귀한 일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 가난한 자 2014.10.28 12:36
    한번 읽고는 아직도 잘 이해가 안가는 말씀입니다.
    항상 마음에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담고 있던 말씀을 말씀으로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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