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2017.09.23 15:02

(21강) 터와 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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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설교>

신자가 인간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에 따라서 인간의 본질은 심판과 저주의 존재로 규정되어 있기에 인간에게서 생산될 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은 구원과 무관하다는 것이 성경에 의한 정확한 평가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심판과 저주의 존재로 보지 않게 합니다. 개개인의 신앙적 자질과 능력에 따라 가치 있는 일도 가능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도 협력할 수 있는 존재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가능성을 두면서 행함에 가치를 두기 때문에 행함에 의한 상의 차등이나 공적에 대한 차별 의식은 사탄적 사고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14,15절을 보면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 말합니다.

 

 

대개 이 구절은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12절)라는 내용과 연결해서 자랑스러운 구원과 부끄러운 구원으로 구분되어 해석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본문의 내용을 ‘금이나 은은 불에 타지 않듯이 자신이 세운 신앙의 집이 내가 세운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세워 주신 것이면 하나님 앞에 인정받아 하늘의 상을 받게 되며 구원을 받아도 자랑스러운 구원을 받게 된다. 하지만 나무나 풀이나 짚이 불에 다 타 버리듯이 신앙의 집이 내가 세운 것이라면 구원을 받는다 해도 불난 집에서 목숨만 겨우 건지듯이 부끄러운 구원을 받게 될 뿐 아니라 수고한 것이 모두다 불에 타버리므로 상도 하나 받지 못하게 된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본문에 대한 전형적인 이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말에서 드러나는 허점은 금과 은과 보석을 불에 타지 않는 공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금과 은은 불에는 녹지만 단단한 보석은 불에 타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면 금과 은도 보석에 포함되기 때문에 불에 타지 않는 공적으로 분류해서 이해해도 되는 듯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사고에 맞추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일 뿐입니다.

 

 

민 31:22,23절에 보면 “금, 은, 동, 철과 주석과 납 등의 불에 견딜 만한 모든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다만 정결하게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하게 할 것이며 불에 견디지 못할 모든 것은 물을 지나게 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성경에서 불은 심판과 소멸의 의미로 언급됩니다. 따라서 세상의 어떤 것도 심판과 저주의 불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심판과 저주의 불을 견딜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윤리와 도덕, 신앙적인 행위와 실천 등이 그것입니다. 선하고 의롭고 믿음에 의한 행함과 실천으로 생각되는 것을 불에도 타지 않고 견딘다고 생각하는 금, 은, 동, 철, 주석, 납처럼 이해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민 31장에서 ‘불에 견딜 만한 모든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라고 말씀하는 것은 불을 견디어 깨끗해지는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불을 견딜만하게 보이는 어떤 것도 하나님의 심판과 소멸의 불은 견디지 못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저 정도면 충분히 구원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그 무엇도 하나님의 불을 지나고 견딤으로써 정결하고 깨끗해지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물을 지나는 것으로만 깨끗하게 될 뿐입니다. 물은 물세례를 의미하는 것으로 죽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지나는 방식으로만 깨끗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일 5:6절에 보면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이 물로 임하셨다는 것은 세례 요한에게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드러났습니다. 물세례를 받으신 것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죄인의 운명에 들어오셔서 함께 하셨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세상 죄를 지시고 죽음을 지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불을 견딜 수 없는 인간은 오직 심판과 저주의 죽음을 지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깨끗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공적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13절에서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고 말합니다.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인 어떠한 것을 시험했을 때 과연 그대로 있을 공적이 있을까요? 금이나 은이나 보석처럼 불 가운데서도 그대로 있을 것처럼 보이는 공적도 하나님의 불은 견디지 못합니다. 나무나 풀이나 짚처럼 하찮게 보이는 공적 역시 하나님의 불 앞에서는 재로 변하여 사라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불 앞에서는 금, 은, 보석, 나무, 풀, 짚의 구별이 없습니다. 모두가 불을 견디지 못하고 태워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구든 인간의 공적을 금이나 은, 보석, 나무와 풀, 짚 등으로 그 가치를 구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을 심판과 저주의 존재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사탄적 사고방식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10,11절에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었고 그 터는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그 터 위에 건물을 세웁니다. 하지만 어떻게 세울까를 조심해야 하는데 그것은 건물을 세우는 터가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누가 그리스도 위에 세우든 자신이 세운 것으로 여기고 자기 공적을 자랑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조심할지니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터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터가 예수 그리스도고 이 터 위에 세워진 것이 교회라면 교회에서는 인간의 공적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의 공적은 불을 견딜 수 없기에 공적을 비교하여 높고 낮음을 평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공적을 비교하고 높고 낮음을 평가한다면 그것은 터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서로에 대해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 즉 행함을 보면서 자신의 신앙 수준과 비교하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고 있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다만 그리스도의 의만이 공적으로 인정되고 그 의로 인해서 거룩한 자로 여김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은 인정하실 것이고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의 만남에서는 비교를 하게 되고 때로는 자신에 대해 자책하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신앙생활의 모습이 현저히 저하된다고 생각되면 자신의 신앙이 그만큼 뒤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책으로 인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공적으로 존재하는 신자 됨의 기쁨이 상실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죽음을 지난 자로 존재함을 뜻합니다. 즉 심판과 저주를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행함과는 무관하게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깨끗함을 입었고 생명에 속한 자로 세움 받았습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믿는 교회에서는 자기 공적을 내세운 자랑이 있을 수 없고, 사람의 공적을 평가하면서 추종하는 분파 역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신자가 마음에 두어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지 자기 공로가 아닙니다. 만약 자신의 공로를 마음에 두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높이고자 하는 것일 뿐이며 우리에게 오셔서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신 피의 은혜와 공로를 무시하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의 공적을 높이고 자랑함으로서 피의 은혜와 공로가 무시되는 것이 지옥 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나타나는 그러한 모습을 두고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하는 육의 사람, 어린아이와 같은 것으로 충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부름 받아 거룩한 성도 된 것이 그들의 본질임을 말하면서 예수 안에서 예수께 속한 자로 존재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신자가 인품이 좋고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중요할까요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벗어날 수 없는 나를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셔서 벗어나게 하신 은혜와 사랑을 아는 것이 중요할까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면 인품이 변화되고 선한 일도 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앎은 곧 변화로 이어지고 변화는 행함으로 나타나고 증거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변화와 행함이 있어야 참된 앎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과도 연결됩니다. 그리고 누구도 이러한 말에 대해 ‘틀렸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변화와 행함을 믿음의 열매로 말하면서, 변화와 행함이 있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강조하는 것이 현대 교회가 추구하는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믿음이든 앎이든 변화와 행함은 있습니다. 하지만 변화와 행함에 대한 바른 이해가 반드시 선재되어야 합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인품과 행동의 변화, 그리고 교회에서 가르치고 강조하는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행함을 믿음과 앎의 증거로는 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앎은 곧 구원 받은 자에게 해당됩니다. 구원 받은 자가 구원의 내막을 안다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적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믿게 됩니다. 왜냐하면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은 심판과 저주의 존재일 뿐이고, 인간에게는 의의 가능성이 없음을 자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앎에서 좀 더 나아가게 되면 인간의 자아성을 보게 되면서 자신을 붙들고 있는 자아성으로 인해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이 훼방되어왔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어떤 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되는 이것이 믿음과 앎에 의한 참된 변화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일하시는 증거인 것이고 그것이 자기부인으로 나타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자기 행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을 보내서 알게 하신 십자가 은혜와 믿음에 의해 받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믿는 자로 존재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믿음에 의한 행함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믿음의 행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신자 스스로 자기 행함을 구별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행함과 영광이 되지 못하는 행함으로 그 가치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 10:31절에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행함이 따로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먹고 마셔야 영광이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특별한 행동이 없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나, 즉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하는 나로 존재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존재의 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터로 하는 신자에게서는 자기 공적이 나와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는 은혜에 속해있고 은혜의 다스림을 받습니다. 이것은 행함 또한 은혜로 인한 것임을 뜻합니다. 은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음을 알게 하고 끝까지 은혜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 있는 신자에게 자신은 늘 부인되어져야 할 대상으로 자각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을 믿지 않는 것이며, 용서와 긍휼을 믿지 않는 것은 자기 행함에 가치를 두고 신뢰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보이지 않는 용서와 긍휼을 믿지 않기에 보이는 자기 행함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심판의 기준으로 자리합니다. 우리의 공적을 저울질하고 많고 적음에 따라 상과 벌이 결정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세계가 아닌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고 말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는 것만 믿으면 됩니다. 자신이 심었고 물 주는 일을 했다 해도 하나님이 자라게 하셨기 때문에 자신에게 돌아올 공적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공적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자기의 공적으로 인해서 받을 상 또한 없습니다.

 

 

우리의 공적으로는 심판의 불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되었다면 그것은 불 가운데서의 구원입니다. 우리의 공적이 아닌 그리스도가 공적이 되어 불 가운데서 해를 받지 않도록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터로 하여 세워진 교회는 그리스도의 공적만을 높이고 자랑하게 됩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그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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