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3.23 09:53

(7강) 피로 인한 속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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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1:7-10http://onlycross.net/videos/eph/eph-010710.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은 자입니다. 풍성히 받았다는 것은 양적인 의미가 아니라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풍성히 받은 신자는 이미 부족함이 없는 자로 부름 받았음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부족함을 느끼며 하나님이 그 부족함을 채워주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 받은 것으로 말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 받은 것으로 신자는 이미 부족함이 없는 은혜의 세계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증거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풍성하신 은혜를 실감하지 못한 채 삽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은혜의 가치보다 세상이 더 가치 있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요? 죄 사함의 은혜의 풍성함은 현실과 상관없는 미래적인 일로 여겨지고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이 더 가깝게 느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죄 사함의 풍성하신 은혜가 세상의 사소한 일에 가려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은혜의 가치에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무엇보다 죄의 무거움을 알아야 합니다. 풍성하신 은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죄 사함인데, 죄의 무거움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는 은혜의 가치 또한 알 수 없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절)고 말합니다. 아마 이 구절을 어렵다고 생각할 분은 없을 것입니다. 실천적인 면에서도 역시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어떤 말씀도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 역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우리에게는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입술을 열어서 ‘주여’라고 부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흔히 전도를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인정하게 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주여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그 믿음이 인정되고 구원 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가 죄 사함의 은혜를 값 싼 것으로 남발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것도 풍성하신 은혜를 풍성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이미 요엘서에 예언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욜 2:32절을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누구든 ‘여호와’란 이름만 부르면 구원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고 조상 대대로 여호와 이름을 부르며 살아온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여호와 이름을 불렀던 이스라엘은 남과 북 모두 하나님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남은 자 중에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부름을 받은 자들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여호와의 부름을 받지 않은 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이름, 즉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불러주신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구원자로 받아들이며 그 이름을 부르게 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의 가치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자들에게만 주어진 복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이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 것으로 얼마든지 죄 사함의 풍성하신 은혜를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놓치고 잃어버린 자로 살아가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에만 가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빈약함, 빈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요할 수 있는 풍성함을 주셨지만 그것은 밀쳐 버리고 보이는 것만 바라보기 때문에 아무것도 받지 못한 자로 빈곤함에 머무는 이것이 신자의 불쌍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분명 복된 자인데도 불구하고 신자 스스로 자신을 불쌍한 자리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이러한 불쌍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요하게 하셨는데 부요를 보지 못하고 늘 부족하다고만 생각하는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돈이 없어서 불쌍한 것이 아니라 풍성한 은혜를 알지 못한 것이 불쌍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고 사하심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신 은혜의 가치는 알지 못하고 썩어질 세상의 것에 붙들려서 사소한 것으로 인한 염려와 근심으로만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 불쌍할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임을 안다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알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그러한 기도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누가 일하신 결과일까요? 여러분의 생각과 의지에 의한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생각과 의지는 항상 보이는 세상으로 향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해 달라’는 기도는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초월한 기도입니다.

 

 

따라서 그 기도는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우리의 생각과 의지가 다스려진 상태에서 나와지는 기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로 인한 기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니라 주를 위해서, 나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나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것이고 이 모든 것이 풍성한 은혜 안에 있는 신자에게서만 나타나는 은혜의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내가 기도했다’‘내가 복음을 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항상 나를 밀어 내고 그 자리에 주를 세우는 것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가 하신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삶의 중심에 주가 계시고 주로 인해서 주를 믿으며 살아가는 삶이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죄 사함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속량하시고 거룩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셔서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간섭과 다스림에 붙들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입니다.

 

 

신자가 이 은혜 안에 있다는 증거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주의 이름을 부르며 진심으로 ‘나의 모든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나는 주의 은혜로 말하고 주의 은혜로 기도하고 주의 은혜로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에 있습니다. 은혜의 증거는 절대로 보이는 세상의 것으로 나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의 잘됨이 은혜의 산물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인한 죄 사함의 은혜를 왜 풍성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까? 피의 공로, 은혜가 아니고서는 세상 무엇으로도 사함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벧전 1:18)라고 말합니다.

 

 

은, 금은 세상이 가치 있게 여기는 보화이지만 그것은 모두 없어질 것들일 뿐이고 대속함은 그처럼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는 것이 베드로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시고 왕이신 하나님께 부름 받았습니다. 부름 받았다는 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부름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십시오. 우린 부름 받을 자격이 없는 악하고 더러운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우리가 부름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에 들어와 있음에 마음을 둔다면 지금 내 앞에 놓인 상에 뭐가 있는가에는 마음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죄로 인해 저주 아래 있는 우리에게 죄의 속량보다 더 큰 은혜는 없으며, 이 은혜 안에서 신자는 부족함이 없는 자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은혜의 풍성함을 더욱 깊이 알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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