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4.27 10:16

(11강) 성령으로 인침

조회 수 3964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엡 1:13-14http://onlycross.net/videos/eph/eph-011314.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설교>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의 오심과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안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아들이 된 신자가 하나님에게 거저 받은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부름 받은 신자면서도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지 못합니다. 이유는 거저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를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기 백성을 방치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기어코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도록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하셔서 그 뜻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것 또한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성령을 우리를 인치신 것도 결국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주지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 그리고 아들이 되게 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신 이 모든 일이 우리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신다면 성경은 창세기 2장으로 종결되어야 합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5)는 말씀을 끝으로 아담과 하와가 영원히 서로 사랑하며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3장에서 뱀이 등장을 하고 하나님은 뱀의 활동을 허용하십니다. 인간이 죄의 길로 가고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을 두고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만 봐도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 구원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하신 것도, 성령으로 우리를 인치신 것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가 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로 살아가는 삶의 방향과 의미가 되어야 함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 덕분에 편히 사는 것을 신앙의 의미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은 자신을 위해 예수를 선택하고 자신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며 예수를 섬기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원하는 바가 성취되지 않으면 감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침도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생각하게 되면 날 위한 인침으로 이해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인침을 자신의 구원 보장으로 간주하게 되고, 그것으로 구원의 문제에 안심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성령으로 인치신 것이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성령으로 인침 받음으로 달라진 것이 있어야 합니다. 기존의 나, 즉 옛 사람으로는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으로는 거저 주신 풍성한 은혜의 영광을 알 수 없습니다. 옛 사람은 자기 육신을 바라볼 뿐이고 육신을 근거로 풍성한 은혜를 계산합니다. 육신이 잘 되는 것을 은혜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새 사람은 육신을 사라져야 할 흙으로 봅니다. 육신으로 인해 악한 사탄의 시험에 빠지고 죄에 끌려가고 있음을 절감하면서 육신의 문제에 마음이 매이지 않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육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자신이야 말로 ‘죄인의 괴수’임을 자각합니다.

 

 

그러한 자신을 부르시고 거룩하고 흠없는 자가 되게 하시고 아들이 되게 하신 거저주신 풍성한 은혜에 눈이 열리게 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인치신 것은 우리를 새로운 마음의 새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이고 그 이유 또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성령으로 인쳤으니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라’는 요구를 하지 않습니다. 애당초 그러한 취지로 우리를 성령으로 인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성령으로 인치시고 영광의 찬성이 되게 했으니 영광의 찬송으로 존재할 것을 요구하실 뿐입니다. 즉 우리가 영광의 찬송이 되기 위해 실천하고 이루어야 할 일은 없는 것입니다.

 

 

거저주신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벽하게 드러났습니다. 풍성한 은혜는 더 이상 채워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고 충만하며 부족함이 없는 은혜라는 의미입니다. 신자는 그 은혜 안에 부름 받은 사람이고 그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찬송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것이지 나의 행함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항상 자기 육신에 매이고 자기의 것을 들고 신을 찾으려는 종교적 본성이 있기 때문에 성령으로 인치셔서 그 같은 인간의 본성을 보게 하시고, 결국 나라는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됨으로 거저주신 은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자신의 실천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 7:4절에 보면 “내가 인침을 받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침을 받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라고 말합니다. 십사만 사천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확정된 수를 말합니다. 이들이 바로 창세전에 택하시고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들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신자는 다만 자신을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일을 자랑하는 자로 존재할 뿐입니다.

 

 

인쳤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지워질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불의를 행한다고 해도 여전히 인침을 받은 신자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불의를 행하는 우리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책망하시고 간섭합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은 성령으로 인친 자기 백성을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진리와 생명으로 이끄심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서 거저주신 풍성한 은혜를 실감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개의 신자들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영광의 찬송이 된다고 할 수 있을까?’라고 미심쩍어 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 일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여러분이 주지해야 하는 것은 ‘인간의 행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는가?’입니다.

 

 

롬 3:2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최고의 윤리를 실천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사만 사천이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다면 그들의 성령 받음은 같을까요. 다를까요? 같습니다. 애당초 인간의 조건으로 부름 받은 십사만 사천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성령 받음에도 차이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방언이나 치유와 같은 능력의 의미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신자로 하여금 새 사람으로 새로운 길을 가게 하십니다. 옛 사람일 때는 오직 나의 이름과 영광에 소원을 두고 행했다면, 새 사람으로 살 때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삶에 소원을 두게 합니다. 나는 낮아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삶이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 열심을 내게 되는 것이 성령충만인 것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본성이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에 익숙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불편해 합니다. 이러한 우리를 성령으로 인쳐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으로 수정되고 나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것으로 기뻐할 수 있기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날짜 번호 분류 제목 글쓴이 조회 수
2010.01.01 공지 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성경강해(이전 설교) 은석교회 20127
2014.07.20 84 에베소서 (22강) 선한 일을 위하여 신윤식 5434
2014.02.09 83 에베소서 (1강) 사도된 바울 신윤식 4978
2014.03.02 82 에베소서 (4강) 선택과 예정 신윤식 4772
2014.02.16 81 에베소서 (2강) 은혜와 평강 신윤식 4758
2015.06.06 80 에베소서 (64강) 분을 품지 말고 신윤식 4559
2014.06.15 79 에베소서 (17강) 진노의 자녀 신윤식 4332
2014.03.16 78 에베소서 (6강) 구원의 이유 신윤식 4291
2014.02.23 77 에베소서 (3강) 신령한 복 신윤식 4242
2014.06.22 76 에베소서 (18강) 불순종의 아들 신윤식 4097
2014.03.09 75 에베소서 (5강) 은혜의 영광 신윤식 4050
2014.04.20 74 에베소서 (10강) 보증이 되사 2 신윤식 3982
2014.04.27 » 에베소서 (11강) 성령으로 인침 신윤식 3964
2014.05.11 72 에베소서 (13강) 바울의 기도2 신윤식 3942
2014.06.08 71 에베소서 (16강) 교회와 그리스도 신윤식 3924
2015.09.26 70 에베소서 (80강) 전신갑주 신윤식 3909
2014.03.30 69 에베소서 (8강) 그 뜻의 비밀 신윤식 3902
2014.05.04 68 에베소서 (12강) 바울의 기도1 신윤식 3867
2014.03.23 67 에베소서 (7강) 피로 인한 속량 신윤식 3849
2014.04.13 66 에베소서 (9강) 통일되게 하심 신윤식 3841
2014.06.29 65 에베소서 (19강) 구원의 이유 신윤식 3817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Next
/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