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014.05.04 10:21

(12강) 바울의 기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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엡 1:15-19http://onlycross.net/videos/eph/eph-011519.wmv

설교듣기(클릭하세요)

 

 

<본문>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설교>

 

1-14절까지의 내용은 신자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증거해주고 있습니다. 사도가 증거하는 신자 됨의 영광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영광의 찬송될 자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이 높임 받음을 의미하는 것인데 항상 자신의 문제에만 집중되어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높이는 일에 온 마음을 둘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일을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신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일에는 전적으로 무관심한 자의 태도일 뿐입니다.

 

 

바울은 15절에서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면서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기도할 때에 에베소 교회의 믿음과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사도의 증거는 우리는 에베소 교회의 믿음과 사랑이 대단했을 거라는 상상으로 끌어갑니다. 하지만 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믿음과 사랑에 대해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실천을 언급하면서 그들을 본받으라는 교훈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가 말하는 에베소 교회의 믿음과 사랑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7절부터의 사도의 기도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기를 구하고, 18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고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알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19절에서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이 어떠한가를 알기를 위해 기도합니다. 이처럼 사도의 기도는 알게 되는 것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도와 우리 기도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알게 되는 것보다는 거의 내게 주어지고 내가 원하는 나로 되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베풀어지는 하늘의 것을 알게 되는 것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실 사도의 기도를 보면 모두 현실의 삶과는 무관한 듯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일 뿐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무엇이며,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된다면 알게 된 자의 삶은 그 모든 것을 알지 못한 자와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은 자신과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 지배 받게 됩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오해하게 되고 자신이 인정하는 믿음을 만들고 그 믿음을 실천하는 일에 힘을 쏟게 됩니다. 그리고 실천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인정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자기 열심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열심을 내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 그것을 자기 열심의 결과물로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에 의한 하나님의 열심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내가 볼 때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는 일 조차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하나님을 알고, 부르심의 소망을 알고, 기업의 풍성함을 알고, 능력의 크심이 어떠함을 알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에베소 교회가 그 모든 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14절까지 보면 사도는 이미 그 모든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가 그러한 내용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가르쳐주고자 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광됨이 무엇인가를 증거함으로써 핍박이 있는 현실에서도 낙심하지 않도록 그들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부르심의 소망을 알고 기업의 풍성함을 알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에베소 교회의 삶이 어떤 현실에서도 그들이 알게 된 앎에 붙들려서 강하게 오직 생명으로 향해 인도 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도가 믿음의 의미를 인간의 열심과 행함에 두었다면 기도의 내용은 이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에베소 교회에 더 큰 믿음을 주셔서 핍박을 이기고 승리하게 해 달라’는 보편적인 기도를 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주체를 인간에게 두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도와주고 좀 더 큰 믿음에 되게 해주는 역할자로만 이해했을 때 나와지는 전형적인 기도가 오늘 우리들의 기도인 것입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행함과 실천으로 하나님께 영광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나 자신의 이름과 영광에 치우쳐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다스리시며 우리의 일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믿음은 이처럼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을 알기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일에는 환경적인 여건과 조건은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설령 지금 당장 죽음에 처할 정도로 쇠약해진 병든 신자라 할지라도 영광의 찬송이 될 수 있습니다. 병상에 누워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 쓸모없는 존재란 없습니다. 다만 교인을 교회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바라보기 때문에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으로 구별하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어떤 형편으로 밀어 넣으시든 그 자리에서 영광의 찬송이 되도록 일하십니다.

 

 

말씀드린 대로 깊은 병으로 인해 고생하게 하셨다면 병상에 누워 있는 처지에서도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신자는 자신에 대해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 우리의 행함과 실천이 포함되지 않는다면 사랑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돕고 선행을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의도 자랑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의 세계에서는 행함을 기준으로 한 높고 낮음과 우월한 자도 따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오로지 예수님의 피의 용서를 원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로 함께 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은혜를 알았기 때문에 서로 용서하고 긍휼히 여겨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이 주 안에서의 사랑의 관계입니다.

 

 

‘주 예수 안’은 주님에 의해 간섭 받고 다스림 받는 세계를 뜻합니다. 신자는 주께서 이루시는 일을 바라보고 박수치며 기뻐하는 것이 주 안의 세계이기 때문에 주 예수 안에서는 자랑되어질 인간의 행함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도가 에베소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들이 믿음 생활을 잘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께서 그들을 다스리고 인도하고 계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의 다스림에 있다면 그에게 실패는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에베소 교회의 교인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붙들고 계신 주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은 주께서 일하신다는 증거로 나타나야 합니다. 만약 ‘내가 일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로 내세운다면 이미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음에서 멀어진 길을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에베소 교회가 하나님을 알고,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의 풍성함을 알게 되어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의 되기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이 기도가 오늘 우리의 기도로 자리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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